꿈꾸는 여행

로마에서의 고독, 그리고 집시

SHADHA 2025. 6. 20. 09:00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린
그리고 아무도 살지 않는 세상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달은
로마의 고독 위로
자신의 창백한 고독을 끌고 간다

그 달은 인적 없는 거리를
울타리를
광장을
아무도 거닐지 않는 정원을
수도사의 목소리라곤 전혀 들리지 않는 수도원을
콜로세움의 회랑처럼 황량한 외딴 수도원을 비추고 있다....... 샤토 브리앙....

 

 

1993년 3월에 업무차 유럽에 갔다가 돌아보게 된 이탈리아 로마의 추억을 32년 만에 다시 돌아본다.

 

 

 

로마에서의 고독

 

어떤 여행지에서나 밤은 늘 고독하다
고독한 산책자..
어쩌면 미치도록 외로운 고독감의 맛으로
여행을 즐기는지도 모른다
로마의 밤에 느끼는 고독감은
다른 여행지에서의 고독감과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


샤토브리앙이나 괴테가
또는 장 그르니에가
그 아름다운 고독감을 위하여
팔라티노 언덕의 달빛 산책으로 강한 유혹을 하나
깊은 밤에 혼자서는 단 한 발자국도 숙소밖으로 몸을 내밀지 못한다
로마의 휴일의 앤 공주가 거리의 벤치에서 잠이 드나
지금 로마에서는 큰일날 일이다.

신들과 황제와 영웅들과
시인들과 예술가들이 달빛아래 폐허에서
더 많은 유혹을 하나 선뜻 따라나서지 못한다
많은 이들의 충고 탓이다
혼자 나서는 로마의 밤길은 극도로 위험하다는 경고.



테르미르역앞 1급 관광호텔인데도 한국의 여관 같은 숙소에서
그 긴 밤들을 보낼 수밖에...
침대에 기대어 틀어놓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파리에서는 눈으로 보는 밤.
로마에서는 귀로 듣는 밤이 된다.
두꺼운 커튼을 제치고 보는 창밖 틈새의 로마는
쉬지 않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유혹한다

그래서
로마의 밤은 더 고독하다.



 

 

로마의 집시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서나 마찬가지로 오랜 습관대로
로마의 아침 햇살이 비추어 지기가 무섭게 홀로 카메라를 울러 매고,
서둘러 거리로 나서 산책을 시작했다.
이 우아한 도시
건축가들과 시인들과 철학자들과 화가들의 흔적이 온 거리에
모든 골목마다 깔려있는 장엄하고 지적인 이 도시에 대한 선입견으로
많은 이들의 충고를 잊고 이른 산책을 나섰다.

공화국 광장으로부터 세르비우스 왕의 숲 속 성벽을 따라,
로마 서민들의 거주지를 돌며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하는 산책.
티르미르역 광장까지 돌아 나올 쯤에야 로마인들의 출근이 시작된다

가벼운 옷차림에 모자를 눌러쓴 동양인의 아침 산책.
처음에는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느라 전혀 의식하지 못했었는데,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질수록 모두들 나를 쳐다본다.
이탈리아인이든, 아랍인이든, 흑인이든, 동유럽인이든.
남녀노소 구분 없이 나를 쳐다본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나의 얼굴이나 눈이 아니고,
목을 따라 내려가 가슴에 걸린 카메라.
비디오카메라를 닮은 큰 카메라에 그들의 눈이 와닿음을 알 수 있다.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흔들며 걷던 두 손으로 카메라를 쥐게 된다.

로마로 오기 전 읽었던 주의사항들을 다시 상기한다.

1.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피할 것.
특히, 역 부근이나 축제행렬에는 항상 소매치기가 있다고 생각하라.
2. 누군가 친절하게 음료수를 권하거든 가급적 사양할 것.
3. 분위기를 잡겠다며 큰길을 벗어난 호젓한 길을 혼자서 가지 말 것.
4. 여성 경우 멋진 이태리 남성이 접근한다고 무작정 따라가지 말 것.
5. 무엇보다도 신문지를 든 4-5명씩 떼를 지어 있는 소녀들을 조심.
6. 함부로 남에게 사진 찍어 달라고 카메라를 맡기지 말 것. 등등...

로마를 범죄의 소굴로 인식될 수도 있는 그 경고가 자신만 조심을 하면
그다지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종착역으로 몰려드는 아침 속을 헤쳐 나가며
아침식사를 위하여 서둘러 호텔로 돌아오는 길.
호텔이 바라다 보이는 비미날레 사거리 모퉁이에 집시인 듯 보이는
소녀 4명이 아침햇살아래 모여 서있다.
그중 귀엽게 생긴 한 소녀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걷는데, 그녀는 내 가슴을 훑고 있었다.
나의 목에 걸려 출렁거리고 있는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 호기심일까?

그녀의 눈동자에서 묘한 광채가 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소녀는 서둘러 다른 소녀들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고는 손마다 신문지 뭉치를 말아 쥔 소녀들이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쥐에게 향하듯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집시 소녀 네 명이 한꺼번에 다가서고 있었다.
고양이가 걸음을 옮기듯 조심스럽게 서서히 나를 에워싸듯
본격적인 전투 대형으로 다가오고 있다.

... 아! 로마의 그 유명한 집시소녀 소매치기.

이럴 때는 소리를 지르라고 했던가?
발로 차는 시늉을 하라 했던가 ?
아무튼 소매치기라 하여도 저리도 귀엽고 예쁘게 생긴
어린 소녀들에게 주먹질을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덜컥 긴장감이 몰려왔다.
1 : 4
말아 쥔 신문지 뭉치 안에는 예리한 칼을 넣어 다니기도 한다는데...
순간적이긴 했지만 소름이 끼침을 느낀다.

... 뛰어, 도망을 쳐?

멈칫거리는 순간 로마의 아침 공기를 가르는 고함소리.
뒤를 돌아보니,
우람한 덩치의 이태리인 남자가 내 곁으로 다가오며,
집시소녀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 집시 소녀들은 잠시 움찔거리긴 했지만 먹이를 포기하지 않고
더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그러자 그 이탈리아 남자는 주먹을 쥐고 소리를 지르며
나의 앞을 막아서며 몸을 움직이니,
그 집시소녀들은 몇 걸음 뒤로 물러서는데 그리 멀리 가지는 않는다.

친절한 그 이탈리아인은 호텔 앞까지 나를 호위하며 동행을 해 주는데,
서둘러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점잖은 표현으로 들어선 것이지 사실은 부리나케 도망을 쳤다.
호텔 로비에서 다시 뒤를 돌아다보니
그 집시소녀들은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그 모서리에 아직 서있다.

순진해 보이는 동양인에 값나가게 보이는 카메라.
멋진 먹이였는데....

식사 후 일행과 함께 포로 로마노로 향하기 위해 나서는 길에
그곳을 다시 보니 아직도 그 자리에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포로로마노를 둘러보던 중 나는 다시 등골이 송연해짐을 느낀다.
내가 지나가야 할 길목에 그 신문지 뭉치를 들고
그 집시 소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말로만 듣던 집시소녀들과의 조우.

그러나 이내 포로로마노의 장엄함과 감탄 속에 빠져들면서
집시소녀들을 잊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