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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대구약령시와 근대로의 여행 본문

大분지에서(대구)

대구약령시와 근대로의 여행

SHADHA 2014. 2. 7. 09:22

 

 

 

대구약령시와 근대로의 여행

대구 겨울산책 5

 

 

 

예전에 대구는 약령시로 불릴 만큼 큰 한약재시장이 열리던 곳이었다.

그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약전골목이다. 약전골목의 역사는 조선시대부터 시작되는데

효종 9년(1658)부터 대구성 북문 근처 객사 뜰에서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한약재를 거래하기 시작했다.

이 약재시장은 우리나라는 물론, 만주, 중국, 몽골, 아라비아, 일본, 베트남 등

여러 나라로 한약재를 거래해 국제시장으로서 명성을 떨쳤던 곳이다.

일제 때에는 독립운동 자금과 연락의 거점이 되어 지속적인 탄압을 받다가 1941년 강제적으로 폐쇄된 적도 있었다.

약전골목은 골목에 깃든 한약냄새 덕분에 걷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많은 약재가 거래되고 있다.

현재 약령시는 남성로와 동성로 3가, 계산 1,2가 수동, 종로 2가, 장관동, 상서동 일부를 포함하는

715미터의 도로변을 따라 분포하고 있고 200여 개 정도의 약업사, 한의원, 한약방이 있다.

.....대구 중구청 자료글 참조

 

 

 

 

 

 

 

 

 

 

 

 

 

구 제일교회

 

 

 

근대문화체험관 계산예가

 

계산예가는

대지면적 313.9㎡, 연면적 126.14㎡ 규모의 근대 체험 전시관으로 이상화, 서상돈 고택 옆쪽에 위치해 있으며

근대 문화에 대한 영상물들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영상관에서는 계산동에서 활동했던 예술가들의 삶과 계산동과 함께 했던 그들의 이야기들을 상영한다.

전시관에는 대한제국시대, 일제강점기, 해방과 한국전쟁, 산업화시기 이후로 시대를 나눠

각각 그 시대사를 영상과 연표로 제공하는 전시실도 마련되어 있다.

또한 영상관과 전시관뿐만 아니라 한옥 전시실과 쉬어갈 수 있는 편의시설들도 마련되어 있어

골목투어를 하다 쉬어갈 수 있다.

 

 

이상화 선생 고택
항일시인 이상화 선생이 1939년부터 1943년에 사망할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상화는 건강악화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예술혼을 불태우며 작품활동을 했지만

상화의 시가 조선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을 생각한 일제 순사가 상화의 원고를 모두 압수해 갔다.

그런 이유로 상화는 생전에 시집 하나 발간하지 못했던 안타까운 시인으로 남게 되었다.

1943년 상화는 빼앗긴 들에 봄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최근 개발로 허물어질 뻔했지만 시민들의 도움으로 철거를 면하고 그의 문학을 기념하는 장소로 남게 되었다.

고택 안에는 상화의 작품세계와 생애가 정리되어 있어 상화와 상화의 문학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상화선생은 떠났지만 그의 시와 함께 고택 곳곳에 선생의 흔적과 역사가 남아있다.

 

 

서상돈 선생 고택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국권 회복을 꿈꿨던 민족 운동가 서상돈 선생의 고택. 구한말 시대의 장사꾼으로, 청렴한 선비로,

교육가로 산 서상돈 선생이 살았던 곳이다.

1850년 김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17살 때부터 보부상을 하기 시작해 큰 돈을 벌었고 대지주가 되었다.

선생은 나라를 위해 자신의 부를 많이 썼다고 하며,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하고 시작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선생은 구한말부터 63세의 일기로 별세할 때까지 민족을 생각하며 민족을 위해 일했던 민족운동가였다.

서상돈 고택은 이상화 고택과 마찬가지로 초고층 건물이 건설될 때 철거될 위기에 처했으나

시민들의 서명운동과 후원으로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대구 중구청 자료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