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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경복궁 경회루 본문
경복궁 경회루
慶會樓
국보 제224호
우리나라의 누각중 최고라 하는 경회루는
국가의 중요 행사시 연회장소로 사용되었던 곳.
태조 창건시의 경회루는 지금처럼 규모가 크지 않았다.
연못도 그리 크지 않았고
연못 가에 수수한 작은 누각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던 것을 태종12년(1412),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연못을 넓히고 못 가운데
인공섬을 만들어 대규모의 다락집을 짓도록 명하였다.
태종은 경회루가 완성되자
세자인 양녕대군에게 편액을 쓰도록 하였다.
이렇게 지어진 경회루는 수차례의 중수공사를 거치면서
그 모습이 조금씩 변하였다.
세종 11년(1429) 대폭적인 수리가 있었고,
다시 성종 6년(1474)에 또다시 수리공사가 있었는데
이때에는 아래층 돌기둥에 용을 조각하였었다고 한다.
그 당시의 경회루는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에 타 없어졌고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경회루의 모습은
고종 4년(1867)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시 지어진 것이다.
이때 용이 새겨진 기둥은 쓸 수가 없어 모두 치워버리고,
지금처럼 문양없는 기둥을 세우고
연못 속에 중심이 되는 큰 섬 외에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작은 섬 둘을 더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이 연못에 구리로 용을 만들어 가라앉혀 놓았는데
이는 나라의 위급 상황시 이들이 나라의 운세를
북돋워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였다.
이 용은 1997년 호수의 바닥에서 실제로 발견되었다.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침전구역의 바로 옆
서쪽에 위치한 경회루는 왕실 전용의 휴식공간이다.
다리를 건너 2층의 누각으로 올라가면
그 마루바닥의 높이가 일정하지 않다.
높이는 3단계로 나뉘어져 있는데
가장 바깥 쪽의 툇간이 가장 낮고
조금 안쪽이 그보다 조금 높아지고
가장 안쪽의 중심부가 제일 높게 되어있다.
이는 연회가 진행 될 때에
신분에 따라 앉는 자리에 차별을 두기 위함이었다.
왕이 가장 높은 곳에 자리했고
그 신분에 따라 상석과 하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구조는
단지 왕의 권위와 신분 위계를 드러내는데 그치지 않고
옛 기록에 따르면
여기에는 주역의 원리가 담겨져 있다한다.
중앙의 가장 높은 3칸은 天, 지, 인의 삼재를 상징,
그 주위를 둘러싼 8개의 기둥은 8괘(八掛)를 상징한다.
내측과 외측의 사이의 공간은 12칸으로 12계절을 상징하고,
이를 둘러싼 기둥 16개의 사이에는
각각 4짝식의 분합문이 달려있어
모두 64짝으로 64괘를 이룬다.
그리고 가장 외곽의 20칸은 회랑으로서
그 기둥수가 24개이며
이는 24절기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건물 하나를 지음에도 조선시대의 건축가들은
그것에 의미를 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경회루 자료글 편집....
집현전자리에 세워진 수정전
강녕전에서 본 경회루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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