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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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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나무 푸른숲

미루나무04 문학 속의 공간 : 탄광

SHADHA 2004. 2. 2. 21:34


미루나무



miru



문학 속의 공간 : 탄광 -- 퍼온 글  

04/29




04


 
[문학속의공간] 16. 탄광
시커먼 재를 안은채 스러졌다

카지노가 성업중이란다. 사람들은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와서는 하룻밤 새에 수백, 수천 만원을 잃고, 건물 복도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하는 모양이다. `백만원 정도로는 명함도 못 내민다'는 그곳에는 또 남의 지갑을 넘보는 소매치기가 극성이라는데, 그 가운데는 기계에게 돈을 잃은 사람들도 섞여 있을 거라는 추측이다. 신문과 텔레비전에 비치는 카지노와 그곳 사람들의 모습은 아무래도 비현실적이다.

하물며 그곳이 불과 몇해 전까지만 해도 시커먼 탄가루가 날리고 앰뷸런스의 불길한 질주음이 거리를 뒤흔들던 탄광촌이었다는 사실을 어찌 짐작이나마 할 수가 있으랴. 탄광업이 사양산업이 되면서 버려진 영화 세트장처럼 흉물스럽게 방치되었던 탄광촌이 카지노의 불야성으로 탈바꿈해 버린 `기적'을 우리는 지금 목격하고 있다. 뽕나무밭이 변해서 푸른 바다가 된다고는 하지만, 탄광촌이 카지노로 몸을 바꾸는 상황은 확실히 초현실적이다. 그런데 어느 눈 밝은 시인은 그 둘 사이에서 가히 필연적이라 할 연관성을 찾아낸다. “사북은 원래 도박장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사북은 원래 도박장이었습니다. 인생에 무너져본 사람들이 다시 살아보려고 흘러드는 곳이었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카지노 사북.”(최승호 <카지노>)

최승호가 사북 등 강원도 탄광지대에서 교사생활을 하며 쓴 시들을 모아 펴낸 시집 <대설주의보>(1983)에는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시들이 적잖이 들어 있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대설주의보>)

석탄의 검은 빛이 바탕색인 탄광촌에 백색의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검정과 하양의 선명한 대비 속에 고립과 단절의 예감이 엄습한다. `군단'과 `계엄령'이라는 표현은 무언가 엄청난 정치·사회적 사건을 암시하는 듯도 하다. 시인 자신이 사북초등학교 교사로서 직접 목격한 1980년 4월의 이른바 `사북사태'가 그것이 아닐까. 게다가 같은 시집에는 <사북, 1980년 4월>이라는 작품도 실려 있음에랴.

“증오와 증오의 투석이다/거리엔 집단적인 돌들이 깔려 있었다//투구와 방패가 번쩍이고/노동의 기쁨 모르는/어두운 손들이 돌을 쥐던 낮/(…)//돌들만이 고요한 광산촌/거리엔 석기시대의 어둠이 깔려 있었다”

사북사태란 무엇인가. 1980년 4월21일부터 4일 동안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광부 1천여 명이 사북지서, 광업사무소, 노조 사무실, 사북역 등을 점령하고 경찰 1명을 숨지게 하는가 하면, 광부의 부인들은 `어용노조' 지부장의 부인을 인질로 잡고 사형(私刑)을 가하기도 했다.

박상우의 장편소설 <시인 마태오> 역시 사북사태와 거의 흡사한 상황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1970년대 후반 현재 신문사 기자로 일하고 있던 주인공 마태오는 정부에 의해 재갈이 물리다시피 한 언론 현실에 자괴감을 느끼고 사표를 던진 채 아버지가 있는 탄광촌 흑사리로 향한다. 흑사리는 검은 개울 흑룡천과 누렇게 유황기를 드러낸 돌멩이들, 차가 지나갈 때마다 자우룩하게 날아오르는 탄진과 한겨울의 폭설, 막장 사나이들의 고성과 남편 잃은 여인네들의 통곡, 그리고 마을 뒤편의 즐비한 공동묘지가 있는, 탄광촌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광부로 변신한 마태오는 어느 날 동료 광부들의 폭력적인 시위와 집단행동을 목격한다. “그날 오후 1시경부터 밤 10시경까지, 그 아홉 시간 동안 태오가 흑사리 곳곳에서 목격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끔찍스런 광기뿐이었다.(…)파업이 아니라 파국의 사육제였다”고 작가는 쓰고 있는데, 그가 말하는 “끔찍스런 광기”가 최승호 시의 “증오와 증오의 투석”이라는 구절과 통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사태가 거기에까지 이르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 채 광부들의 과격한 행동과 그 결과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점은 아쉬움을 준다.

이 작품들을, 사북광업소의 광부가 쓴 <사북사태 진상보고서>의 결론과 비교해 보자. 소설가 조세희가 사진산문집 <침묵의 뿌리>(딸림상자 참조)에서 인용하고 있는 그 글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광산노동자들의 목숨과 맞바꾸고 있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살인적 임금구조가 개선되지 않는 한, 노동자들의 최소한의 생존요구인 노동조합의 민주화와 이를 위한 제도적 개선 및 노동정책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사북항쟁은 계속될 노동자 항쟁의 서막에 불과할 것이다.”

이원규의 시집 <빨치산 편지>는 탄광노동자들이 놓인 열악한 상황과 그것을 타개할 방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앞의 `진상보고서'와 기조를 같이한다. 이 시집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부모 세대의 빨치산 체험을 다룬 앞부분과 시인 자신의 탄광 체험을 다룬 뒷부분이 그것이다. 시인은 1986~7년 고향인 경북 문경 홍성광업소에서 후산부로 일한 경험을 시집의 제4부와 5부에 담았다.

“아아, 저것은 피다/규폐 진폐로 거덜난 가슴/울컥울컥 피 토하는 천씨 어른의 하늘이다/아아, 저것은 목숨이다/울분의 가슴에 천공을 하고/다이나마이트에 불을 댕기는 막장꾼의 분노다/흩어지면 죽는다/파업가를 부르며/더 이상 막장은 세상의 막장이 아니라/투쟁, 투쟁의 최전선이다”(<꽃병>)

1990년에 출간된 이원규의 시집이 `80년대적' 상투성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령 프랑스 소설가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과 같은 일급의 탄광-노동소설이 나오자면 이원규의 시와 같은 분노와 열정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국문학은 결코 `<제르미날>'을 생산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1980년의 사북사태는 한국 광업노동운동사의 절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동운동이 시들기 전에 탄광업 자체가 사양길을 걷기 시작했다. 에너지의 중축이 석탄에서 석유와 가스, 전기로 옮겨 가면서 전국의 탄광은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고 광산노동자들은 노동과 싸움의 기반을 영영 잃게 되었다.

폐허의 역설적 아름다움에 민감한 시인들이 폐광촌에 주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경림 기형도 김수영 문태준 등의 시인들이 <폐광(촌)>이라는 이름의 시를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음은 흥미롭다. 이 가운데 기형도의 <폐광촌>의 한 대목.

“땅속 깊이 불을 저장하고 우리는 일어섰다./날음식처럼 축축한 톱밥이 우리를 쳐다보았다./곧 이어 바람으로 불려갈 석탄에 삽날을 꽂으며 이제는/각자의 생을 퍼담아야 할 차례였다./(…)/폐광촌 역사에는/아직도 쿵쿵 타올라야 할 것이 있었다.”

그렇다. 탄광촌의 뜨거운 역사가 무너진 폐갱처럼 다만 깜깜 어둠 속에 묻혀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쿵쿵 타올라야 할 것”이 하필이면 카지노의 불야성이어야만 했을까. 얄궂은 노릇이다.최재봉 기자bong@hani.co.kr 사진 조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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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눈물이 있다 그곳에는...

소설가 조세희가 사북읍에 가 것은 1984년 7월과 이듬해 2~3월 두 차례에 걸쳐서였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이라는 아름다운(!) 노동소설의 작가는 <난쏘공> 때와 마찬가지로 “긴급하다는 한 가지 생각”을 지닌 채 사북으로 향한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노트와 펜말고도 카메라를 휴대하고서였다. 그는 사북에서 찍은 100여 컷의 사진과 관련된 산문을 모아 사진산문집 <침묵의 뿌리>를 펴냈다.

비록 몇 해의 유예기간이 있긴 했지만, 조세희의 사북행이 1980년의 `사북사태'에 촉발된 것임은 분명하다. 두 번째 사북행에서 그는 그곳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등사판 글모음을 구해 읽었는데, 그가 “이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책”으로 보관하고 있다는 그 책의 글들은 슬픈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삼학년 때 밥을 안 싸 가지고 갔기 때문에 배가 고파서 집으로 왔다. 집에 오니 밥이 없었다. 나는 배가 고파서 아무나 때리고 싶었다.”(5학년 김상은)

“우리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하시는 훌륭한 분이시다. 탄을 캐다가 우리나라에서 땔 수 있게 해 주시는 우리 아버지.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모습을 몇 번 봤다./우리 아버지는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시다가 돌아오신다. 그리고 쉬는 날에도 일을 하러 나갈 때도 있다. 우리 아버지는 기술이 참 좋다.”(6학년 박현석)

검은 탄가루를 얼굴과 옷에 묻힌 채 역시 검은 도시락 보자기를 들고 갱구를 나서는 광부들, 광부 가족이 사는 집단촌, 사택 앞의 좁은 마당에서 해맑게 웃으며 널을 뛰는 소녀들, 찢어진 선거 포스터와 금간 학교 건물…. 작가의 사진은 그가 인용하고 있는 누군가의 말대로 “슬프고 겁에 질린 시대에 적합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이 땅에 사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 동안 우리가 지어온 죄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그는 말하는데, 그가 사진과 산문으로써 증언한 80년대 중반의 탄광촌 사북이 아직까지 한 권의 소설을 낳지 못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최재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