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샘
<잠시 낯선 곳이 그리워질 때...>
09/30
<잠시 낯선 곳이 그리워질 때...>
여름 내내 흘리고도 남은 눈물이 저 하늘에 더 있단 말인가. 가을을 재촉하는 비라지만 아열대의 스콜처럼 한낮에 소나기가 되기도 하고, 한 밤중이나 새벽에 왔다가 밤손님처럼 검은 발자국을 남기고 가버리기도 하는 비가 아쉬움도 없이 흔하다. 세상을 휘젓는 氣流가 이러하니 문화와 時流가 또한 그리 혼미하여 가끔은 對中없는 세상 속에 서 있는 나 자신의 정체도 알 수가 없어진다. 그래서일까? 문득 잃어버린 시간과 낯선 곳에 애틋하게 다가서고 싶은 것은...
추석 전날이자 첫 휴일의 새벽이다. 지난밤에 방아 찧어다 냉장고에 넣어둔 쌀가루를 뜨거운 물로 익반죽해서 송편을 빚는다. 삶아둔 모싯잎이 적어서인지 그리 검지 않아 도리어 초록이 선명한 송편이 설탕과 깻가루와 건포도를 품고 솥 단지 안에서 익어 나온다. 얼린 대구를 꺼내서 살짝 녹은 전에 포를 떠서 전유어를 부친다. 계란물이 어중간히 남아서 애호박 반개를 둥글게 썰어서 호박전도 부친다. 햇과일이라고 선사들어 온 포도와 배 한 상자씩이 있고 포도주 두 병이 있으니 추석을 위한 준비로 만만이다. (아니 그러고 보니 갈비세트와 한과, 김부각도 한 석작 씩 있다.)
그러나 우리 집은 특별히 차례를 지내는 것도 아니고 식구가 많거나 모이는 집도 아니다. 기독교식이며 둘째네라는 것이 좋은 핑계가 되었지만 하려면야 왜 할 일이 없으랴... 아무튼 우리는 이제 그 지긋지긋한 명절 신드럼에서 벗어난 셈이다. 명절이나 생일, 제사 기일이 다가오면 며칠 전부터 머리를 썩이시던 시어머님이 안 계신 후로, 또 교육상 필히 차리던 아침 차례상도 아들들이 다 외지에 나간 후로는 그조차도 간략하게 된 우리는 명절은 휴일이고 만고강산이다.
서둘러 송편을 빚고 아침은 찬밥을 다지어 누룽지로 끓여 먹은 후 휴가길에 나섰다. 며칠 전 신문에서 보아둔 전주 한옥 마을 체험을 하기로 한 것이다. <양사재>라는 한옥체험 숙소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한옥 생활을 체험해보기로 했다. 우리 시골집이라야 지금 형태는 남아있지만 앞뜰에 컨테이너 박스를 두고 가게로 꾸며서 세들어 사는 이가 살고 있으니 이젠 우리 맘대로 들릴 수 있는 곳도 아니다. 신혼엔 명절이면 그 집에서 펌프로 물을 푸고 아궁이에 솔가지나 아카시아 가시나무를 때면서 울기도 많이 했었다. 밤새 덜컹거리는 사립문 소리에 잠 못들기도 했었다. 그러다 그 힘든 시절이 얼추 다 끝나버리자 이젠 한옥에 삶을 체험하고파서 가고 있는 것이다.
전주까지 달리는 서해안 고속도로의 상행선은 한적하기만 하다. 반대 차선의 밀리는 것에 상대되는 속도감을 즐기며 신나게 달리며 바라보는 주변 경치는 이제 누릇하게 패어 가는 벼이삭들로 들판은 화사하다. 옹기종기 무더기 소나무들이 둘러선 구릉의 아담한 모양은 그대로 정원이 되고 들판의 작은 섬이 되어 시원한 솔바람과 향기를 불어내 준다. 추석을 맞아 곱게 벌초한 산소들의 작은 봉오리들도 아담한 동산처럼 봉긋봉긋하다. 명절이라지만 부담없이 휴가를 즐기는 것은 사실 최근들어 그가 도량이 넓어진 까닭인지 모른다.
한 때는 정말 팍팍하기만 했던 그가 참 많이도 변했다. 전에는 부득이 낮 시간에 자기 차에 타게되면 뒷자리에 꾹 쳐밖혀있기를 바라고 앞자리엔 절대 앉지 못하게 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지난 중국 출장길엔 내 휴가와 맞추어 뒤따라오면 상해에서 합류해서 출장을 연장하고 구경시켜줄 계획을 가져보기도 했었다. 아마 그 케이비에스 피디 사건이 없었다면 그리 할까하는 관용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주위를 의식하는 소심과 평소의 처신대로 하고 만 그는 이번 추석 연휴는 전적으로 내 계획에 따르기로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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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 박제영
가을에는 잠시 여행을 떠날 일이다 그리 수선스러운 준비는 하지말고 그리 가깝지도 그리 멀지도 않은 아무데라도
가을은 스스로 높고 푸른 하늘 가을은 비움으로써 그윽한 산 가을은 침묵하여 깊은 바다
우리 모두의 마음도 그러하길 가을엔 혼자서 여행을 떠날 일이다 그리하여 찬찬히 가을을 들여다 볼 일이다
2003.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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