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샘
<등피를 닦아 마루에 건다.>
09/05
<등피를 닦아 마루에 건다.>
떠나는 날 아침이다. 불쌍하달 정도로 지친 발을 계속 맛사지하며 뜨거운 물에 씻었다. 오늘만 잘 참아다오 당부를 한다. 역시 동녘이 가까워서인가, 5시부터 해가 뜬다. 마지막 방 정리 짐 싸기, 아침 식사는 명란젓과 연어구이에 흰죽을 먹고 요플레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운 냉매를 실컷 먹었다. 야채 셀러드와 열대과일들을 요구르트에 섞어서 후식으로 먹는다. 홍차 반잔으로 일본에서의 식사를 마무리한다. 아무튼 음식만은 나무랄 수 없이 정성이 깃들어 있고 배울 점이 있다. 물론 우리나라처럼 궁중 음식과 같은 품격이 있는 건 아니지만 건강식이라는 것만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池袋(이케부쿠로)라는 별난 이름의 동네도 썬샤인 시티라는 빛나는 이름도 작별이다. 일본 국철을 타고 日募里(니뽀리)에서 나리타공항 가는 버스를 타야한다. 그렇게 해가 지는 곳에서 서쪽의 집을 향해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가사활동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기어이 와이어리스 진공청소기를 사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김남일 선수. 그는 잠시 나를 니뽀리 역에 세워두고 전자 상가가 있는 아키히바리에 갔다온다고 한다. 한 시간쯤 도착하고 떠나는 지하철역에 앉아서 수첩을 꺼내들고 밀린 것들을 적고 있노라니 멋있는 여인들이 가끔 눈에 띈다. 특히 나이든 여인들의 아름다움이란 부러움이다. 간편한 원피스 위의 짧은 볼레로, 그리고 진주 목걸이. 샤넬 라인의 스커트 길이. 몸매가 드러나지는 않지만 깨끗한 팔꿈치 피부가 인상적이다.
나리타 공항 가는 길은 한 시간 이상 들판을 달린다. 동대사에서 산 전화카드를 기어이 소진하려고 해도 국제 카드가 아니면 아무 전화기나 되는 것이 아니다. 니뽀리에서 만난 싹싹한 대만청년이 일, 중 한국어를 다 능숙하게 말하며 그런 사정을 설명해준다. 그는 우리 아들도 저래야 한다고 몇 번이나 되뇌며 부러워한다. 한국에선 그리도 과묵한 사람이 외국에선 어찌 그리 말이 많은지 간 곳마다 사람을 사귄다. 그런데 외국에서 만나는 또 다른 외국인들이 더 친밀한 것은 우리가 함께 객지에 있기 때문일까?
나는 떠나기 전에 본 재일 동포 고영리가 쓴 <유리탑>과 전여옥의 <삿포로에서 맥주를 마시다>를 아직도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여행의 끝에 접어들도록 일본의 실체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물론 대화가 없어서라지만 누군가와 짧은 감정이 통하는 순간조차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사람, 식당에서 서로 옷깃을 스치는 사람, 길을 물으면 그리도 친절한 사람, 그러나 그들에게선 아무런 共鳴도 餘韻도 없다. 유년기의 묘한 추억으로 동경하던 일본 그러나 증오와 갈등을 유발하기도 했던 나라... 혀끝에 올려놓는 맛 거리를 음미하듯 조용한 침묵 속에 잠겨서 세계를 탐색하는 나라. 때로는 망언으로 때로는 반성으로, 때로는 유감으로.... 그러니 그들을 정확히 정의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여행의 목적은 나이를 먹을수록 여행지에 대한 탐색보다는 현재의 나 자신의 입지와 남은 진로를 더욱 사색하고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다. 문득 마주치는 타인들이 던져주는 새로운 감동으로 나를 洗滌해 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풍랑 치는 바다를 건너면서 잔잔할 때는 미처 몰랐던 동행자의 마음 바닥에 숨겨진 아름다운 보석 상자를 발견하는 것도 큰 수확이다. 그는 기어이 공항에서 금빛 체인의 세이코 시계를 사주고 만다. 그 시계 속에 흐르는 시간은 암묵적인 사랑이며 약속이다. 이십 오년 전 받았던 첫 시계의 감동이 다시 살아나며 남은 시간들과 함께 걸어갈 길을 생각한다. 광에 던져두었던 낡아서 흐려진 호롱의 등피를 닦아 내 오두막에 불을 밝히리라. 가마솥 걸린 속깊은 아궁이에 장작불을 던지며 푸르스름한 부뚜막 연기 피어오르게 군불을 때리라. 뒤란의 이끼 낀 우물물을 길어 날마다 따스한 밥과 잠을 지어서 돌아올 그대를 기다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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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2
-최하림
나 물 속처럼 깊이 흘러 어두운 산밑에 이르면 마을의 밤들 어느새 다가와 등불을 켠다
그러면 나 옛날의 집으로 가 잡초를 뽑고 마당을 손질하고 어지러이 널린 농구들을 정리한 다음 등피를 닦아 마루에 건다
날파리들이 날아들고 먼 나무들이 서성거리고 기억의 풍경이 딱따구리처럼 소리를 내며 달려든다 나는 공포에 떨며 밤을 맞는다
밤이 과거와 현재로 부유스럽게 흘러간다 뒤꼍의 우물도 물이 차오르는 소리 밤내 들린다 나는 눈을 꼭 감고 다음날 걸어갈 길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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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넉두리같은 글을 오래 참고 보신 여러분께 사과와 함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행은 어쩌면 긴 여운을 남김으로 당시보다 더 소중할 수 있는 <땅의 회상>이기에...
일본의 실체를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한 탓에 그저 아름다운 시편들의 의지해서 글에 제목을 붙이고 후광을 입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도 일본을 좀더 깊이 알기 위한 애벌 기록으로 삼으렵니다.
2003.8.10
푸른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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