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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푸른샘149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살았다 본문

깊고 푸른 샘

푸른샘149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살았다

SHADHA 2004. 2. 14. 17:31


푸른샘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살았다...>

09/30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살았다...>


길 떠나면 지도 읽기 싫어하는 여자, 그러나 하는 수 없이 讀圖法을 익히고 함께 물어물어 찾아가야 한다. 전주로 가기 위해 동군산 아이시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났다. 이윽고 이어지는 전주간 고속화도로를 달려 <호남 제일관문>이라는 큰 대문 (사실은 커다란 누각 형태의 육교)를 통과하니 바로 시내의 번화한 거리에 들어선다. 번화하다지만 건물의 높이는 별반 높지 않은데 다투듯이 얼굴 내민 간판들의 글씨가 어찌나 큰지 깜짝 놀라게 된다. 아마 가분수의 생체를 보듯 작은 집을 온통 뒤덮은 간판의 크기는 좀 특이하다. 월드컵 경기장을 지나 버스터미널과 전주역 사이 대로를 쭉 달려서 풍남문을 찾아간다. 전주부성의 4대문 중 하나라는 풍남문은 남대문과 같은 형식의 성곽과 樓門으로 이루어져 있다.


풍남문 앞에서 바로 고개를 돌리면 한국 천주교 순교 일번지의 역사를 담은 <전동 성당>이 보인다.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절충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성당이라 한다. 특이한 양식의 건물이라지만 너무 오래 먼지와 매연 속에 서있었던 듯 좀 지저분하다. 성당 앞을 지나 한옥마을로 꺾어들어 어디든 주차하고 천천히 길을 걷기로 했다. 여기저기 남은 공터에 외지 차들이 흔하다. 점심을 넘긴 시간이라 우선 식당을 찾기로 하고 조금 걷다가 우연히 <전주공예품 전시관>에 들어서게 되었다. 전시관에는 다완과 다기셋트 등의 도예작품과 염색, 한지 수공예품 그리고 소목 공예품들이 눈에 띈다. 내소사의 연화, 국화문양과 똑같이 재현된 문창살 한쪽이 삼백 오십만원이다. 수없이 많은 답사가들의 발길을 모은 내소사의 것보다 더 공들이고 더 섬세하고 더 단단하고 아름답다. 유리상자 안에 보관되어 있으니 아마도 휠씬 더 오랜 수명을 누릴 것이다.


공예품전시관의 뒤뜰은 왁짜하다. 들어서 보니 널뛰기, 굴렁쇠 굴리기, 팽이와 투호놀이, 윷놀이 등으로 어른 아이 없이 신나게 놀고 있다. 한지공예 전시관에는 이곳 전주 한지 제작의 유래와 한지를 이용한 다양한 기법의 여러 가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 다른 공예전시실에는 섬유공예 작품전과 옹기 작품전이 열리고 있다. 그 작품들의 색다른 무게와 진지한 품격에 놀라며 인사동에서 보던 세련되고 유려함과는 다른 분위기에 충격을 받았다. 인사동의 싸구려 외래품의 혼입이 주던 현기증을 벗어나게 하는 진솔한 작품들만이 빚어내는 섬세하고 다정한 맛이 그런 것 같다. 아무튼 내게도 필요한 몇 가지 도안을 본 뜨고 마음이 흡족하였다. 뒷마당에 입구를 가진 공예교실에 들어서면 실제로 접시에 그림을 그려 자기 작품을 만드는 꼬맹이 도예가들로 한 가득이다.


공예교실의 뒤뜰로 나가면 작은 후원으로 열린 <교동다원>이 나온다. 한지를 바른 밀창이나 작은 연못, 아주 작은 분수, 아주 작은 돌탑 등에 정신을 앗기고 잔잔한 아악을 들으며 몇 컷의 사진을 찍도록 주인은 안 나타난다. 수련과 옥잠화 노란 분꽃과 비비추, 그리고 벌개미취, 수세미... 작은 꽃밭에서 만들어지는 소인국 나라를 엿보다 돌아선다. 나중에 차 한 잔 마시려 꼭 들리고픈 곳이다. 점심 먹으러 들른 <민속마을>도 오밀조밀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이다. 이곳 전주 사람들은 모두가 예술가이다. 생활 주변의 작은 정원에서, 탁자에서, 음식에서, 하나하나가 정성과 애정으로 엮어진 모습이다. 연못의 냉기가 시원한 곳 나무 탁자에 앉아서 오랜만에 만나는 유기 그릇에 담긴 산채 비빔밥 한 그릇으로 전주의 맛을 처음 느끼다.


길로 나서니 향교와 경기전 부근의 모퉁이 공원 벤치에 노인들이 바람을 쐬며 명절 분위기를 즐기고 있다. 지나는 이들과 안부를 나누거나 소식을 묻는 모습이 아늑한 시골 정자나무 아래의 풍경이다. 아무튼 오늘은 쉬는 날이라 해서 점심을 먹지는 못했지만 이조 궁중식사를 할 수 있다는 <교동 한식>이나 차 마실 틈을 못 내어서 들르지 못한 찻집 <달새는 달만 생각한다>라는 좌석 두 자리의 옹색한 찻집은 다음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한 뺌의 정원에 어우러진 분꽃과 메꽃 그리고 보라색 초롱꽃의 사진을 찍으며 그 부근 길가에 화덕을 내어놓고 모여앉아 석쇠에 불고기를 구워먹는 이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고기 냄새, 그리고 한가함을 함께 즐기다.


우뚝 선 성당의 외양에 잠시 일별하고 돌아들면 바로 <경기전>이다. 경기전 입구의 관광안내소에서 몇 가지 소개 책자를 얻었다. 이곳은 이조왕조 태조 이성계의 어진(영정)을 봉정한 곳이다. 뿐만 아니라 고종과 순조, 영조와 정조, 철종, 세종대왕의 영정도 모셔져 있다. 당시에 쓰던 가마(연)의 모습을 보니 오늘 날 한 갓 범부의 호화에도 비길 수 없는 초라한 것이지만... 경기전의 주위엔 여러 사적과 부도, 비석 그리고 큰 소나무들로 우아한 넓은 마당이 오래 발길에 밟혀서 비 온 후인데도 질척거리지 않고 단단하다. 서울 근교에 있었다면 입장료 톡톡히 받을만한 아늑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경기전 뒤뜰에 앉아 우선 숙소를 정하기로 하고 안내 책자를 뒤적이다가 <양사재> 가는 길을 물었다. 산책 나온 어르신이 자상하게 일러준 길을 찾으려 경기전 좌측 후문으로 나가서 <연꽃을 피운 돌>이라는 찻집 앞을 지나다보니 뜻밖에 <최명희길>을 걷게되었다. 아, 최명희 생가터가 주변에 있다했지... 걷다보니 막다른 골목길에 표지석과 안내판이 나란히 서있고 벤치 두어 개가 놓인 곳에 닿았다. 마침 그곳에 나앉아 계신 어르신에게 물으니 이곳이 최명희씨가 살던 곳인데 집은 작은 적산가옥이라서 길이 나면서 헐리고 없어졌다 한다. 본디 남원에 생가가 있고 이곳에서는 성신여고에 다니던 시절과 그 후에 잠시 살았던 집이라 한다. 노인과 잠시 <혼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짧은 삶을 애도하며 사진을 찍고 헤어졌다.


돌아서 좁은 골목을 나서는데 헐어질 듯 얕은 담장 위로 시들한 수세미꽃들이 노란 얼굴을 잔뜩 오므리고 피어있다. 아, 그녀의 삶이 조금  더 길었더라면 한국 여인의 훌륭한 기상을 당당하고 유려한 문체의 글로 많이 남겼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가슴을 할퀸다.


************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대숲에서는 제법 바람 소리까지 일었다.
하기야 대숲에서 바람소리가 일고 있는 것이 굳이 날씨 때문이랄 수는 없었다,
청명하고 볕밭이 고른 날에도 대숲에서는 늘 그렇게 소소(蕭蕭)한 바람이 술렁이었다"로 시작되는
200자 원고지 1만2,000장 분량의 '혼불' 5부 10권이 완간되어 1996년 12월,
마침내 세상에 나왔다. 17년에 걸친 대장정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소설 '혼불'에 대한 작가 최명희(崔明姬)의 열정과 집착은 보통 사람의 상상을 초월했다.
'혼불'을 위해 결혼도 미루었고 암 선고를 받고도 탈고를 눈앞에 둔 4개월 동안
한번도 편하게 자리에 눕지 않았다.  작품 <혼불>과 '생명'을 바꾸었던 것일까?
51세 미혼인 채로 98년 12월11일 오후 5시경 입원중인 서울대병원에서
지병인 난소암으로 별세했다.


90년대 한국문학사에 최고의 문학적 성과를 남긴 채 혼불처럼 살다가 혼불처럼 스러져간 것이다. 혼불을 쓰면서 작가가 남긴 글들을 보면은 '혼불'의 불길에 휩싸여 얼마나 사무쳤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
그리고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 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하고 외로웠다.
좀처럼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모아놓은 자료만을 어지럽게 쌓아둔 채,
핑계만 있으면 안 써보려고 일부러 한눈을 팔던 처음과는 달리 거의 안타까운 심정으로 쓰기 시작한 이야기 <혼불>은 드디어 나도 어쩌지 못할 불길로 나를 사로잡고 말았었다"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간절한 일이랴.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풍화마모되지 않는 모국어 몇 모금을 그 자리에 고이게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만일 그것이 어느 날인가 새암을 이룰 수만 있다면. 새암은 흘러서 냇물이 되고, 냇물은 강물을 이루며, 강물은 또 넘쳐서 바다에 이르기도 하련만,
그 물길이 도는 굽이마다 고을마다 깊이 쓸어안고 함께 울어 흐르는 목숨의 혼불들이, 그 바다에서는 드디어 위로와 해원(解寃)의 눈물나는 꽃빛으로 피어나기도 하련마는.


나의 꿈은 그 모국어의 바다에 있다.
어쩌면 장승은 제 온몸을 붓대로 세우고, 생애를 다하여, 땅 속으로 땅 속으로, 한 모금 새암을 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운 마을, 그 먼 바다에 이르기까지..."
<혼불>의 작가 최명희가 남긴 마지막 유언은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살았다"
그만이 남길 수 있는 유언이리라! .




2003.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