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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함양 정여창 고택에서 본문

가야의 땅(경남)

함양 정여창 고택에서

SHADHA 2006. 8. 7. 00:22

 




함양 정여창 고택에서

지곡면 개평마을







대문에서 바로 들여다보이는 사랑채는
ㄱ자 팔작집으로 들축대가 높직하고
추녀는 활주로 받쳤을 만큼 날개를 펴서 더없이 시원스러운데
툇마루 한쪽편을 약간 올려앉혀 누대의 난간처럼 감싸안았다.
사랑채 옆으로 난 일각문(一角門)을 통하여
안채로 들어서니 앞마당이 직사각형으로 길게 뻗어
아래채와 사랑채로 연결된다.
사랑채 뒤쪽으로 툇마루를 붙여
안팎으로 분리된 공간을 하나로 묶어놓는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중에서








일두 정여창 鄭汝昌

1450년(세종 32)~1504년(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김굉필, 김일손등과 함께 김종직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5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490년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예문관검열, 세자시강원설서, 안음현감 등을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그는 유학적인 이상사회,
즉 인정(仁政)이 보편화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자(治者)의 도덕적 의지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주자학적 세계관을 우주론적으로 해명하는
이기론(理氣論)과 함께 개인의 도덕성 확립을 위한
심성론(心性論)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이기론의 경우 이(理)와 기(氣)는 현상적으로 구별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지선(至善)하며 영위하는 바가 없는 반면에
기는 유위(有爲)하며 청탁(淸濁)이 있으므로 구별된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학문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물욕(物欲)과 공리(功利)를 배제할 수 있는
입지(立志)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그의 성리학은
정몽주(鄭夢周),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 사림파의 주자학적 학문을 계승한 것이었다.
사림파는 인(仁)을 보편적 가치의 정점으로 삼아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를 공격했다.
정여창 스스로 성인을 공언하여 이러한 사명의 담지자로 자처했고
결국은 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저서는 무오사화 때 소각되어 대부분이 없어지고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 文獻公實記〉에 일부가 전하며,
1920년 후손이 유문을 엮어 만든 〈일두유집〉이 있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굉필(金宏弼) 등과 함께
5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자료글 편집....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 정여창

보물 제1046호





정여창의 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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