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인가부터 노년의 리들리 스코트는 전쟁광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젊은 시절 한 때 광고계에서 최고의 자리를
누렸으며,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어서선 SF계의 선구자로 우뚝 선 것도 모자라,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전쟁 서사극의 대부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최근 제작비 문제 등으로 제작이 지연되고 있는 <트리폴리 Tripoli>나 <글래디에이터 2
Gladiator 2> 역시 리들리 스코트에 의해 탄생할 확률이 높으며 이 모두 장르가 전쟁 서사극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리들리 스코트의
영화적인 사상을 탓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에게 깊은 역사 의식과 냉철한 정치적 해석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리들리 스코트의
손을 거친 전쟁은 단지 선혈이 낭자하고 시체가 나뒹구는 그런 학살의 현장은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동생인 토니 스코트와 함께 프로덕션 '스코트 프리 Scott Free'를 세운 이후 그는 <지.아이.
제인>, <글래디에이터>, <블랙 호크 다운> 등의 전쟁 장르 영화들을 연출해 왔다. 그 중
<글래디에이터>는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인정받으며 제작자로서 그에게 처음으로 오스카의 영광을 안겨주었던 작품. 그로부터 5년 뒤
리들리 스코트는 무려 1억3천만 달러를 들여 완성한 에픽 <킹덤 오브 헤븐 Kingdom of Heaven>을 내놓기에 이른다.
배경은 로마 제국에서 중세 십자군 원정 당시로 옮겨 왔으며, 주인공도 마초 기질이 다분한 러셀 크로우에서 뭇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꽃미남' 올란도 블룸으로 교체됐다.(기획 당시 리들리 스코트는 러셀 크로우를 염두에 두었다고 하니 교체됐다는 말이 적당할 듯 싶다) 아무튼
리들리 스코트의 신작 역시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틈 속에서 영웅으로 거듭나는 한 인간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
그런데 이 영웅의 모습이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건 분명하다. 앞서 언급한 러셀 크로우와 올란도 블룸의 외모,
성격적 차이만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킹덤 오브 헤븐>의 주인공 발리안(올란도 블룸)은 프랑스 어느 시골의
대장장이(blacksmith)로 지내다 십자군 기사인 아버지 고프리(리암 니슨)의 뜻에 따라 기사 작위를 수여받고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위기에
처한 예루살렘의 국왕 볼드윈 4세(에드워드 노튼)를 도와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천상의 왕국 Kingdom of Heaven'을 지켜내야
하는 것이 발리안의 첫 번째 임무인 것이다. 아버지를 쏙 빼 닮아 순식간에 국왕과 여러 기사들에게 신임을 얻는데 성공을 거두는 발리안은, 그러나
아랍인들과의 평화 협정을 깨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쟁을 일으켜 아랍인들을 몰살시키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는 왕의 처남 '기 드 루지앵'의
견제를 받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차기 왕권을 노리는 '기 드 루지앵'을 제거하고 예루살렘의 새로운 왕권자가 되느냐 아니면 운명에 따라 전쟁을
선택하고 백성을 보호하느냐의 갈림길에 서는 발리안의 두 번째 임무가 시작된다. 이와 동시에 왕의 여동생 시빌라 공주(에바 그린,
<몽상가>들로 데뷔한 프랑스 출신의 여배우)와의 로맨스가 아슬아슬하게 펼쳐지지만 이것이 영화의 중심으로 자리잡진 못한다.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나약해 보이지만 고뇌하는 영웅, 어느 한 쪽만을 위한 진리보다는 모두를 위한 선(善)과
의(義)을 먼저 행하는 영웅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즉 발리안은 '나와 적'이라는 이분법적 개념이 탄생시킨 일방적인 영웅이 아니라 인류 모두의
영웅이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보는 이에 따라서는 발리안의 선택이 적절치 못했다거나 유토피아를 꿈꾸는 감독의 이상주의적 세계관 등이 논란을
야기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어찌 알겠는가, 산전수전 다 겪은 일흔 살에 가까운 이 노장의 마음을….
하지만 <글래디에이터>와 <블랙 호크 다운> 등의 영화에서 보여준 박진감 넘치는 액션
씬만큼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좋게 말하면 변함이 없다는 말이고, 나쁘게 말하면 액션 장면이 별로 새로울 게 없다는 뜻이다. 어쩌면 우리는
<반지의 제왕>, 특히 마지막 편 <왕의 귀환> 이후 어떠한 대규모 전투 장면을 보더라도 감탄하거나 놀라워 하지 않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필자 역시 영화 사상 가장 거대한 전투 장면을 보여준 <왕의 귀환> 이후에는 <트로이>, <킹
아더>, <알렉산더>에 이르기까지 이에 버금가는 대작들의 대규모 전투장면을 보더라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을까? 영리한 리들리 스코트는 약 2시간 20분의 러닝타임 동안 전투 장면에 그리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예루살렘의
차기 왕이 된 프랑스 출신의 '기 드 루지앵'이 수만 대군을 이끌고 살라딘의 군대를 정벌하러 나선 전투는 아예 그 전투 내용 조차 과감히 생략해
버린다. 단지 전멸당해 모래 바닥에 나뒹구는 시체들만이 전투에서 십자군이 패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감독은 발리안과 살라딘의 최후의 전투만큼은
공을 들인 것 같다. 스펙타클한 영상과 살아 숨쉬는 대규모 전투씬을 만들고자 했던 스코트는 이 마지막 30여 분간의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세계
각국 전문가들을 총동원하고 CG를 최소화 하는가 하면, 수천 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하기에 이른다.
사실감 넘치고 생생한 화면, 거기까진 좋다. 그렇지만 리들리 스코트는 올란도 블룸이란 새로운 영웅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분출해 내는 데는 실패를 거둔 듯 싶다. 수만 명의 군중들 앞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칼을 높게 뽑아 든 올란도 블룸이 '그림'
상으로는 예쁘고 멋지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그런 행동에서 심장을 박차 오르는 감동과 카리스마는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발리안은
로마의 옛 원형 극장에서 모두가 목소리를 높여 부르던 '막시무스'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 영웅도 변하는 법이라고 했던가, 발리안은
새로운 영웅이거나 혹은 영웅이 되지 못한 그야 말로 '대장장이'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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