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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푸른샘92 세번째 목수 김씨전에 다녀와서 본문

깊고 푸른 샘

푸른샘92 세번째 목수 김씨전에 다녀와서

SHADHA 2004. 2. 14.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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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샘




세번째 목수 김씨전에 다녀와서...

07/01








 
모름지기 남자라면...

한 남자의 원시성과 문화성을 가장 잘 드러나게 하는 일은, 어쩌면 한 가족의 안전과 성장을 담아줄 집 한 채 짓는 일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도 우리들의 아버지 자신이 목수가 되고 미장이가 되어 볏지붕을 올리고 흙담을 발랐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그의 성격과 마음씀까지 다 드러나던 집짓기의 역사가 통째로 돈벌기 한 가지로 수렴되어버린 세상입니다. 나는 어제 <목수 김씨전>을 보기 위해 <인사 아트 쎈타> 지하 전시실을 들어서는 순간, 등받이 없이 긴 판자로 된 의자를 보며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중앙에 조심스레 앉지 않으면 한쪽으로 쓸려 넘어지던 간이 장의자... 그 어설펐던 아버지의 작품을 겹쳐보며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목수 김씨의 나무 소재 작품들은 모두 나무 등걸이나 판의 휨 혹은 가지의 돋아남을 그대로 이용한 가장 자연 친화적인 형상과 아늑함을 담고 있습니다. 보랏빛으로 물을 올린 어금니 모양의 은행나무 독 의자, 청남빛 짐승처럼 웅크린 무거운 잣나무 장의자를 선두로 귀롱나무 가족용 벤취, 잠자리들이 흩날리는 가을 동화같은 은행나무 벤취, 두발을 딛고 선 의자, 돌 사진 찍기 마땅할 량으로 파인 낮은 의자, 혹은 낙엽송 잡목을 이용한 입 큰 물고기(아마 명태), 단풍나무를 이용한 풀잎 스탠드, 향나무의 속을 판 선반함 등등 전시장은 하나의 삼림 속만 같았습니다.

그는 또 지난한 나무 다루기의 작업 중에 부서지고 못 쓰게된 금속 공구들을 용접하여 각질의 초충류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자루 잃은 삽등을 이용하여 만든 <삽날개발광충>은 윤기 나는 검푸른 등의 움푹 파인 곳이 분명 좌우 대칭의 한 마리 벌레입니다. 도끼날과 장도리 머리를 이용한 <알을 낳은 새>, 철과 손드릴과 볼트, 니퍼를 이용한 <벌레를 만들다 잠든 날>은 그의 내공에 깃든 나무와 쇠라는 자연의 두 속성이 함께 생명을 부르고 창조하는 작업이 얼마나 조화로운 것인가를 문득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무엇보다도 수많은 나무들의 속살 빛과 결을 보여준 것이 경이로운 일이었지요. 잠자리가 무수히 날아다니는 무늬를 프린트한 쪽빛 통의자는 나이만큼 육중해진 체중을 받아 안기에 넉넉한 은행나무의 강한 섬유질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잔 결을 보여주지 않는 은행나무의 은은한 온기와 매끈한 속살은 그대로 여체의 허벅지가 되어 볼록하고 동그스럼한 나무의 몸태 그대로를 살린 관능적인 의자가 되어있었습니다.

단풍나무의 하얀 우윳빛 속살은 연마로는 만들 수 없는 생래적인, 천상 타고난 것이어서 어루만지기에도 두려운 부드러움과 향기가 품어져 나옵니다. 그 나무의 생시 모습도 그 우아한 줄기의 경사와 베일처럼 넓게 뻗은 숱많은 가지의 자애로운 모습으로 잎이 푸를 때나 붉게 단풍들 때나 감탄과 찬사를 한 몸에 받았던 귀한 나무였음을 알게 합니다.

묵직한 황토색 위로 옻칠을 먹여 더 검고 윤나는 소나무 의자나 콘솔의 속 깊은 살성은 대갓집 맏며느리의 자태 그대로입니다. 튼실하고 당당한 몸피로 모든 나무들의 잔재주를 제압하던 숲의 시절부터 소나무는 철갑같은 수피의 모자이크 조각들을 빈틈없이 둘러쓰고 오래된 산성의 붉은 토양을 이기며 바위 사이의 척박한 물줄을 견디어 왔습니다. 오래 이 땅을 지켜온 들보감 나무의 속성에는 괭이와 옹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어머니의 손바닥처럼 투박함과 강인함이 보입니다.

독일형 피아노의 순갈색을 띈 호두나무는 부드러운 지방성 윤기와 균일한 무늬 결이 일품입니다. 넉넉하게 도는 기름기가 잘 자란 귀공자 출신같은 호두나무는 귀하고 알찬 견과류 열매를 맺던 나무답게 그 줄기의 수관과 체관을 영양가 있는 수액으로 그득 채웠던 여유가 만만합니다. 강하고도 유연한 육질은 섬세하고 날선 조각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순순히 새겨지는 무늬를 받아들이는 멋쟁이 청년나무임을 느끼게 합니다.

가래나무 두 쪽의 판자는 괄호처럼 마주 만나서 탁자의 상판이 되었습니다. 그 부드러운 휨이 안은 것은 밖으로 새어나갈 수 없는 밀어들뿐일까, 그 자신이 우리 안에 갇힌 야성의 포호를 담은 막된 흔들림의 결로 더욱 서로를 끌어안고 밀착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목소리를 가로막고 숨겨주는 공간 건너서, 다시 만나 들여다보면 그 흔들림은 침묵 속에 흐르는 잔 물살같은 오직 설래임이었을 뿐임을 가래나무는 말간 얼굴로 비춰줍니다.

속 빈 물푸레나무를 생긴 그대로 다듬어 콘솔 위의 선반함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물가에서 살았던 물푸레의 서늘하고 풍성한 이마는 두개골처럼, 혹은 물고기의 뱃속처럼 오목하게 파인 속에 무언가를 기다리던 습성만을 남겨두었습니다. 누군가 그 텅 빈 공간에 짧은 편지의 초고, 혹은 잠깐 벗어두는 반지, 머리 핀, 그리고 잠들기 전 안경을 벗어 넣어두리라. 그리곤 시냇가에서 하얀 속옷들 탕탕 두들겨 빨래할 때면 기다려지는 길손을 위해 너울거리던 푸르디푸른 물푸레의 손가락들을 꿈꾸리라.

잣나무는 언제나 숲의 전경으로 다가옵니다. 울창한 초록의 침엽수 숲은 모두가 내게 잣나무 숲처럼 향기롭고 고소하기 때문입니다. 육중한 몸통을 그대로 살려서 잔가지를 다리 삼아 진초록으로 물들인 무거운 의자. 그 형상은 정녕 그 울창한 침엽수림에 서식하는 한 마리의 육식동물이었습니다. 끝없는 나무와의 겨루기로 육체의 고통을 받으며 때로 탐식에 대한 혐오까지도 불러오는 벅찬 무거움, 잣나무의 비중은 인간의 번뇌 무게만큼 아직 깊은 그늘 속에 놓여있습니다.

만지거나 앉지 말라는 경고문이 없었다면 모두가 한 번쯤 앉아 보고싶던 의자들인데 아쉽게 돌아 나오다 팜플렛을 사며 물었지요. "목수 김씨가 누구세요? 대한민국의 삼십 퍼센트는 김씨이고, 우리 집에 가면 칠십 오 퍼센트가 김씨인데..." 그는 저쪽에서 수줍게 어슬렁거리며 알릴 듯 말 듯 눈을 돌리다 그만 발끝만 바라보더군요. 안내하는 여직원이 가서 받아다 준 싸인에는 그의 이름이 김진송이라 쓰여있었습니다. 멋들어서 흘려 쓴 글씨체가 여늬 회사원이나 공무원처럼 예각지기도 하고 단호하기도 해서 그가 손을 나무 깍기에만 쓰는 武官이 아님을 알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쓴 글을 통해서 육체의 피로와 고단함을 무엇보다 힘들어하는 문약한 정신의 소유자, 그래서 더욱 영혼의 통찰과 진지함이 베어있는 작품이 되었음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모름지기 남자라면가족을 위해 나무 의자 하나 만들어주지 못할까요? 마흔 셋, 이제 김씨라고 숨기에는 한참 커버린 거목처럼 가지 울창한 한 남자, 그에게서 자연의 열정과 에너지를 듬뿍 받아 나오며 그의 성장과 정진이 그 정신과 영혼 속에 오래 뿌리박기를 빌었습니다.


   '01.7.1

   원시림 속의 힘을 받은 푸른샘.

PS ; 허영선님, 소개하신 김순자 개인전에 다녀왔는데 참 좋았습니다.
작가와의 만남이 더욱 그렇더군요.
다음에 인사 드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