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푸른샘93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본문

깊고 푸른 샘

푸른샘93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SHADHA 2004. 2. 14. 00:35


푸른샘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07/02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이혜경 도예-풀, 꽃, 향>의 전시실에는 지극히 색을 아꼈는데도 온갖 자연의 색이 다 살아 숨 쉬고있습니다. 분청자기 안에 숨어있던 회색, 갈색, 연황토색, 기와색, 투박한 흰색, 미진한 청자색, 푸르스름한 녹색, 벽돌빛 철사자기색 혹은 그 사이에 숨겨두었던 어떤 색인지가 각기 자기만의 소우주를 창조하여 뽐내고 있습니다. 못생긴 어문으로, 흩어진 풀잎으로, 날리는 갈꽃으로 혹은 해를 품고, 달을 이고 있는 문양이, 물 한 방울 담을 수 없는 바늘 구멍 만한 홀(hole)을 중심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 규모의 작고 모양의 이즈러짐이 주먹 안에 쏙 들어서 만만한 듯 하면서도 얼마나 지난한 각고의 결과인지는 오밀조밀한 작품 속을 이리저리 뜯어보면 바로 느껴집니다. 그것은 한없는 자유와 숭고함을 맛본 자의 넉넉한 造物이며 인생과 존재의 피안을 관류한 자의 積善이 빚은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오직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관람 온 우람한 체구의 남성들까지도 살금살금 걸으며 얼굴엔 쪼끄마한 미소를 띄우고 '야, 정말... 예쁘다.'를 속살거릴 때 그 작은 신생아들은 고요히 잠들어있습니다.

그녀의 도예 작품을 한껏 살려준 소도구들은 바로 자연, 야생화와 풀잎들을 말린 압화들입니다. 일 년 내내 정성껏 모아서 누르고 보관하였다가 꺼내놓은 압화들은 정녕 생화보다도 더 큰 생명의 값을 나타내 주었습니다. 살아있는 크고 푸른 식물들의 삶이 도리어 압도되는 작은 풀꽃들의 사후 모습을...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었습니다. <풀씨조차 떠나버린, 빈 꽃받침이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모든 것을 상실하여 빈 몸으로 남아, 한 방울 물기조차도 다 탈수된 자취뿐인 삶이, 그 희미한 흔적이 아름다운 것을 깨닫게 하는 한 마디 언어를 나는 깊숙이 안았습니다.

풀은 흙을 만나서 싹을 틔우고 조심스레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으며 드디어 꽃을 피웁니다. 작고 조심스레, 가장 겸손한 모습의 풀꽃을 내놓고 기다립니다. 잠시 부는 한줄기 바람이나 스치는 빗방울, 혹은 작은 주홍이나 보라의 부전나비 순례를 막연히 그리워합니다. 그리곤 우연히 맺히는 풀씨들을 간수하기 벅차서 스스로 허리를 휘며 서서히 마르고 시들어 갑니다. 그래서야 마른 솜털 끝의 가벼운 풀씨들을 멀리까지 날려보낼 수 있으니까요. 풀꽃의 생리는 애틋한 기생의 위치를 당연히 아는 부끄러움과 소박함으로 점점 그렇게 작아지는 몸피가 되었나 봅니다.

작품들이 얹힌 座臺 또한 빼어난 작품이었습니다. 부러 애쓴 것 하나 없는데도 오래된 국민학교 시절 걸상이 <5-1 조순하> 라고 크레용으로 새겨진 채 나타나서 밑받침이 되어주고 있었습니다. 버려진 칼자국 투성이의 나무 도마, 문짝 떨어진 이층장, 찰떡 치던 안반, 손님이 오면 내다보던 작은 밀창의 나무문살이, 막 만든 연상이, 엿장수 좌판이 모여서 그 옹종종한 작품들을 빛나게 할 조연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칠이라곤 전혀 안되어 거칠고 꺼스럼 일어나 세월이 미는 대로 부데끼고 때 절은 나무 도구들은 운 좋게도 사람의 손을 만나서 다시 한번 감탄사를 받고 있었습니다.

나는 고르고 골라 검고 회색과 갈색이 도는 기왓장 질감의 화구를 하나 샀습니다. 그것은 안은 텅 비어있고 위로는 솟아난 사면체의 동산 모습을 이루고 있는데, 검은 쪽 면에는 하얗게 상감을 입힌 들꽃 무늬가 한 풀밭을 연상케 하고, 반대쪽의 흐린 회색 면은 새 발자국같은 무늬를 연속으로 찍어두어 마치 철새 도래지의 섬, 혹은 절벽을 연상케 합니다. 지붕격인 상면에 낸 구멍을 중심으로 새의 얼굴인지 물고기의 얼굴인지가 새겨져 있는데, 미루어 짐작컨대 이 작품은 하나의 외로운 섬, 그러나 가장 행복한 섬임에 틀림이 없어 보였습니다.

작가 이혜경씨는 작품을 포장하면서 매화 꽃모양의 엄지 손가락만한 화구 하나를 덤으로 주었습니다. 넉 장의 꽃잎이 꽃자루 위에 얹혀진 기본형의 작품인데 꽃잎에는 무수한 바늘 구멍이 찔려있어서 안쓰러움을 느끼게 하는 기법이었습니다. 아마도 여인의 삶이 안고 있는 바느질의 생리, 무엇이든 꿰매고 이으며 메꾸고 담아야했던 바늘과의 떨칠 수 없는 인연을 그렇게 향기로운 꽃잎의 얼굴에 새겨둔 것만 같았습니다.

그녀는 도토리 깍지만한 작은 잔에 녹차 한 잔을 대접해주었습니다. 엷은 푸른빛이 도는 청자의 모양은 고려청자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투박한 깍정이라서 도리어 정감이 묻어났습니다. 기교없이 뭉뚱그려 만들어도 그렇게 진솔하고 따스하며 생명력이 넘칠 수 있다면 작가의 한 삶은 지고지순한 자연과의 사랑을 완성한 셈이리라. 오 시시도 안 되는 작은 차 한 모금이 바늘 구멍만한 내 마음의 갈피로 스며들며 은근한 향으로 퍼질 때 장마비 내리는 창 밖의 습도가 한갓 지나는 하늘의 유희로 느껴지며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슬며시 사라졌습니다.



******

사계절이 있음을 기뻐하며
피고 지는 삶을 본다.

저마다의 모습으로
생을 살지만
존재들은 한결 같다

피고지는 찰라나
묻혀지는 존재들이나
한 마음으로 외쳐댄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존재의 아름다움을 느끼면
모두가 자연이 된다.
그들의 窓을 통해
충만한 기쁨이 된다

존재하는 것이 기쁨인 것을
사계절이
아주 아주 여러 번 지나고
알게 되었다.

이천 일년, 솔모루(松隅)에서 이혜경

*****



'01.7.1

비에 젖어 가득 찬 푸른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