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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푸른샘116 할머니들의 가을 피크닉 본문

깊고 푸른 샘

푸른샘116 할머니들의 가을 피크닉

SHADHA 2004. 2. 14.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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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샘




할머니들의 가을 피크닉.

10/26








할머니들의 가을 피크닉


여행은 다른 자연과 문화를 엿보는 망원경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이라는 타자 辨別설에 공감합니다. 자연을 바라보며 삶의 비밀을 푸는 법을 깨닫고, 자연을 통하여 삶의 메시지를 解讀하기도 하는 까닭입니다. 자연 속에서는 특별한 교육과 훈련을 받지 않고도 누구나 사물에 대한 선천적 감수성으로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고, 드러난 현상의 본질적인 핵심을 刮目한 감각으로 꿰뚫어 느끼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이나 세상을 사는 지혜와 경륜이 두둑이 쌓인 老人과의 여행은 비록 그 행보는 느리지만, 어느새 비취는 여유와 스미는 깊이에 편안한 맘으로 同行하게 됩니다. 계절은 가을, 만물이 성숙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지금까지, 그들은 주어진 역할을 철저하게 연기하며 살아온 완벽한 俳優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랑은 아직도 現在時制이며 自動詞로 하는 사랑이며, 그러기에 더욱 강하고도 아름답습니다.


아직도 다 주지 못한 사랑이 다 먹지 못할 만큼 가득한 음식과 德談으로 넘쳐납니다. 출발한지 십분도 못되어서 몇 가지나 되는 음식들의 맛을 보아야되고 허리띠를 풀어버려야 되는 飽滿의 가을 피크닉을 떠났습니다. 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벌써 누렇게 황금빛으로 넘실거리는 들판의 풍년과 알맞게 피어오른 억새무더기들의 경사로 지난 여름의 열병을 잊게 합니다. 그래서 열병의 回復期, 가을에는 누구나 자신의 컨텐츠를 다시 채워 가는 시기입니다.


나는 때로 책 속의 검은 먹물이 내 뇌수를 온통 검게 물들이는 순간이 두려워 자연 속으로 떠납니다. 건너편의 감나무, 전봇대에 와서 우짖는 새, 물가에 휘늘어진 버드나무의 가벼운 흔들림으로 이 가을 나만의 느낌을 形象化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가을 들판은 황금빛으로 풍성하고 곳곳마다 주홍빛 감들이 하늘에 수를 놓은 듯 평화롭습니다. 머리카락 풀어 가지런히 반짝이는 은발의 억새 밭을 지나며 다함께 노래를 부릅니다.


When I grow too old to dream,
I will have you to remember,
So kiss me, my sweet, and so let us apart...
When I grow too old to dream,
that kiss will live in my heart.


머나먼 기억의 강 건너에 함께 드나들던 교문이 보이고, 교실의 창 밖에는 학생 독립운동의 기념탑인 '감자탑'이 서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멋을 갖춘 英語선생님의 목소리에 묻어 황홀하게 부르던 노래가 이제 실감나게 느껴집니다. <내 꿈을 꿀 수 없이 되었을 때, 너를 기억할거야... 그러니 내 사랑, 키스하고 또 안아 줘. 내 꿈을 꿀 수도 없이 되었을 때, 그 키스는 내 가슴에 남아 있을꺼야...> 열 다섯의 나이에 이 노래의 쌉스름한 뒷맛을 어찌 알았겠는가......


작은 버스는 근교의 한적한 길을 달려서 텅빈 듯 적요한 종교적 城地에 내려주기도 하고, 깎아지른 바위 아래 다가붙은 庵子에 데려다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나보는 백일홍의 씨앗을 받기도 하고, 도토리알을 줍기도 하며 우리는 그저 소소히 스치듯 흐르는 바람과 시간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약효가 좋다는 해수찜으로 기운을 빼고 또 다시 흠씬 먹으며 색종이로 오린 듯 크고 붉은 해가 기울어 내리는 바닷가를 달렸습니다. 마침 해안도로를 달리는 동안 수평선 위에 머물러 오래 함께 해준 노을의 아름다움이 진정 고마웠습니다.


돌아오는 길,곱게 주름진 선배님들의 얼굴은 하루를 무사히 보낸 安堵感으로 편안해지고, 자장가처럼 달고 부드러운 노래를 불러줍니다. 어둠이 짙어질 때의 두려움을 조용히 걷어내는 輓歌처럼 촉촉이 스미는 곡조입니다. 들판에 논불을 놓아 푸르게 오르는 연기는 이리저리 흩어집니다. 그리 쓸쓸해질 때 언제고 돌아가면 반겨 맞아줄 영원한 母性의 모습으로, 가을을 지나 당당히 겨울을 채비하시는 노령의 가슴이 한없이 넓고 포근해 보입니다.


 '01.10.26

 동문회 막내 푸른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