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샘
담양 가까이...
06/17
담양 -황지우
내 관절 속으로 산 너머 먼 비가 오려고 함 내 눈깔에 잔득 낀 먹구름 뒤안 대밭에 이는 소란한 부채 소리 대숲 상단에 새로 돋은 불붙는 연초록 외치고 싶도록 눈부심 바람 타는 숲 전체가 괴로움 이 속에 집 짓고 삶.
***
<죽순 캐던 날>
새벽에 마른 가루를 두유에 탄 생식 한잔으로 요기를 하고 길을 나선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산안개 자욱해서 가까이는 관목들의 모습이 고슬고슬하게 살아있는 스카이라인이 보이지만, 멀리 서있는 산들은 농담이 다른 담채의 물감을 풀어 듬뿍 적셔놓은 듯 겹겹이 아득하다. 요즈음 지천인 금계국은 쭉 뻗은 노란 길가를 달리다가 동그란 무덤 위에서는 반원을 그리며 한들거리고 있다. 안개가 차바퀴 아래 밀려나가는 고갯길에선 푸드득 날아오르는 산꿩을 만나기도 하고 뻐꾸기 울음소리에 숙연해지기도 하는 것이 산소 가는 길이다.
자주 가는 어머니 산소는 그새 또 잦았던 봄비로 풀이 무성하고 한창 피어버린 삐비와 이태리 들국화 하얀 꽃들로 소박하게 아름답다. 고추막대과자처럼 푸엉하게 홀씨를 달고있는 삐비를 하나 꺾어서 혀에 대어본다. 솜사탕처럼 부드럽게 녹아서 젖어든다. 그러나 먹을 수는 없다. 나름대로 달고 부드럽지만 먹어본 적이 없어서겠지. 저만큼 발아래 논에는 못자리 물을 자작이 잡아두고 논둑가에 제초제를 살포하는지 발동기 모터 소리가 빈 들판을 두드린다. 타타타탁, 타타타
낫을 꺼내들고 토방부터 능숙하게 낫질을 시작하는 이 곁에서 웃자란 쑥을 움켜쥐고 뿌랭이째 뽑는다. 쑥은 언제나 같은 자리, 무덤 봉우리의 오른편에 원형의 무리를 이루고 있다. 쑥의 군락이 뽑힌 자리는 소년의 빡빡머리에 남은 기계독 자국처럼 허연 흔적을 남긴다. 살아생전 흰 머리카락 한 올 뽑아드리지 못했고 검은머리 염색 한번 해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무덤을 만질 때마다 마음을 할퀸다. 그래서 더욱 샅샅이 더듬어 쓰디쓴 독백같은 쑥과 잡풀들을 골라낸다. 드디어 예쁘게 깎인 중학생 머리처럼 까실하게 남은 풀들의 수액이 토해내는 향긋한 냄새는 도시의 먼지와 황사 바람에 찌들은 폐에 아로마 향처럼 스미는 것 같다.
묘비로 세운 烏石에 쓰인 글은 성경 구절이다 <저는 종일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들이 복을 받는도다.> 얼마나 我田引水격인 글이냐. 바로 저(어머니)의 생전의 행사를 들어내기보다는 그로 인해 복 받기를 希願하는 자손들(나)의 모습에 잠시 부끄러움을 느낀다. 근처에 지천인 진보랏빛 아름다운 엉겅퀴를 꺾어 화병에 꽂으려다가 가시에 손만 여러 군데 찔렸다. 뒷산에서 우는 뻐꾸기 소리만이 간간이 진저리쳐지게 조용하다. 제초제 치던 농군은 벌서 일을 끝냈는지 오토바이를 타고 금새 사라졌다. 여린 모들이 줄맞추어 서있는 얕은 논물 속에 구름이 가라앉았고 푸른 개구리밥이 한가롭게 떠돈다.
옷자락이 스치자 민들레 홀씨가 푸르르 날리는 고샅길을 돌아서면 바로 눅눅하고 짙은 그늘의 대숲이다. 그 길에 들어설 때마다 해저에 풍덩 잠수한 듯 갑자기 낮아지는 기온과 소리의 단절 때문에 막막해지기도 한다. 대숲엔 언제나 청량한 바람이 있다. 대숲은 항상 단소를 부는 듯하다. 숲의 빈터에 어른어른 내리는 햇살은 댓잎 사이로 푸른 영혼의 무늬를 그린다. 내 삶의 한 길이 그곳에 그려진다. 오래 전 한 남자의 등을 보며 그의 조상들의 산소로 걸어가던 길, 대숲 사이로 하얗게 백토가 드러난 오솔길을 묵묵히 걷는다.
몇 년이고 계속 떨어져 쌓여 폭신한 댓잎 이불 사이로 뽀족히 고개를 내민 죽순이 발에 밟힌다. 홑이불 둘러쓴 서양 유령처럼 휘늘어진 늙은 대 아래로는 꼿꼿하고 낭창낭창한 청죽이 한 무리, 그 아래로 웃자란 죽순이 회초리같은 댓가지에 붉은 새 잎을 틔우며 흔들리고 있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는다더니, 내 모양은 많이 변했는데 숲은 언제나 같은 모습이다. 광풍을 맞아 온몸으로 뒤척이던 여름밤과 안개처럼 내뿜던 겨울새벽의 서기를 숨기고 지금 초하의 대숲은 얕게 생명의 숨결을 내쉬며 나를 맞을 뿐이다.
산소 위까지 새순을 올린 대를 낫으로 쳐 내린다. 산소 가까이 접근한 것들도 톱으로 베어낸다. 여기저기 베어낸 자리는 죽창처럼 예리해져서 조심하지 않으면 발을 찔리게 된다. '야야 고급 구두 다 버릴라...' 어디선가 어머니의 걱정하시는 소리 들린다. 까맣게 돋아난 죽순 따라 점점 더 깊숙이 헤매다 보니 대밭 아래로 어머니가 무를 심었던 곳에 누군가 고추밭을 만들어 놨다. 머우랑 고구마도 심었다. 무성해지는 수풀 때문에 올 가을에는 아무래도 제초기를 하나 사야겠다고 한다.
욕심껏 죽순을 캐고 보니 두어 푸대는 족히 된다. 그런데 이걸 삶아서 다듬을 일을 생각하니 은근히 걱정이 된다. 예전에는 어머니가 다 손질해서 잘디 잘게 쪼갠 죽순을 가져다 주셨어도 시큰둥 했었는데... 이젠 죽순 맛을 어느 정도 가늠하게 되고 보니 봄비 후에 돋아난 여린 것들을 더욱 탐내게 된다. 밭가에 선 산감나무엔 형광빛을 띈 연두색 감잎이 파삭파삭 햇빛을 부수고 있다. 감잎차도 만들 요량으로 생생하고 깨끗한 끝잎으로 두어 주먹이나 땄다. 어린 아이 배꼽같은 어린 감똥이 다닥다닥 야물게도 붙어있다.
몇 가지 일들을 더 보고 집에 돌아와 큰 들통에 두어 번 나누어 죽순을 삶았다. 검붉은 껍데기를 벗기자 속살이 뽀얗게 드러난 죽순이 두 다라이나 된다. 마루에 신문지를 깔고 내외가 앉아서 죽순을 다듬는다. 연한 것들을 길게 찢어서 봉지봉지 담아서 김치냉장고에 갈무리해둔다. 제철이 아니라도 가끔 먹고싶을 때면 한 봉지씩 꺼내어 초고추장에 무치거나 풋고추 된장국에 넣어서 끓이면 아삭하게 씹히는 맛과 향이 우후죽순의 봄날을 추억하게 하는 일등식품이다.
늦어서야 일을 마무리하고 자리에 누우니 아직도 耳鳴처럼 귓가에 댓잎 스치는 소리 바람처럼 스산하고, 낭창거리는 청죽 허리에 매달린 푸른 이파리들 눈앞에 아른거린다. 생시에 얼굴도 못 뵌 아버지, 사십 여 년을 줄곳 누워 계시는 산소를 생각하며 내 생의 종말도 그러하리 여긴다. 그를 알게 한 한 삶을 더듬어 만져본다. 어느 새 고른 숨소리 내쉬며 昏困이 잠에 빠진 한 생명 곁에 또 한 가닥 뿌리를 내리듯이 발을 쭈욱 뻗는다.
2003년 6월
푸른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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