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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푸른샘134 그 길은 아름답다 본문

깊고 푸른 샘

푸른샘134 그 길은 아름답다

SHADHA 2004. 2. 14.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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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샘




<그 길은 아름답다>

08/13








 
<그 길은 아름답다>


정오에 집을 떠나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밀며 집을 나서면 벌써 내 몸은 내 마음대로가 아니다. 세상의 물줄기가 밀거나 이끄는 대로 흘러가야 한다. 서서히 차량의 흐름 속에 묻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정해 논 시간표대로 섞여가야 한다. 수많은 바퀴 자국 혹은 발자국 사이로 彼我를 구분할 수 없는 또 하나의 흔적을 그리며... 어쩌면 끌려가는 사람처럼 나는 집을 나섰다.


광주 공항이 가까워오자 일주일 이상 차를 세워둘 곳을 물색한다. 공항주차장은 꽤 비싼 주차료를 주어야 하기에 주변의 적당한 아파트를 골라서 한쪽에 얌전히 주차시켜두는 꾀를 낸다. 이곳에서 김포행 비행기를 타고 다시 인천으로 이동해야한다. 그래저래 시골에 사는 사람에겐 여행 시간과 여행비의 십퍼센트 정도가 추가되는 셈이다. 활주로와 평형으로 잘 가꾸어진 메타 세콰이어 가로수길 쪽으로 통로를 댄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며 달려간다.


비행기는 한적한 분위기의 공항 주변을 감상하듯 느릿느릿 격납고 앞을 한 바퀴 돈다. 그리고 드디어 활주로에 들어서자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맹렬한 속도로 가속을 붙인다. 날개 차양이 덜컹거리고 실내등이 흔들리고 온 몸통이 진저리를 치다가 불끈 솟아오른다. 이륙이다. 어지럼증인지 상승의 쾌감인지 잠시 붕 뜨는 느낌에 눈을 감고 있다가 바깥을 보니 비행기는 구름을 후 후 불어 젖히면서 위로위로 솟구치고 있다.


경지 정리 잘 된 비행장 주변 논들은 잘 이어 만든 퀼트의 조각보처럼 얌전히 깔려있다. 군데군데 모닥거려진 함석 지붕을 인 집들, 그 사이로 진초록의 수풀과 아담한 구릉의 그늘이 환히 照鑑된다. 윷가락을 나란히 엎어놓은 듯한 하얀 비닐 하우스 동들이 출렁이며 물결을 이룬다. 비행기는 구름을 찢어 젖히며 좌우로 흔들리며 오목 렌즈 속 같은 지상을 두루 살피며 오른다.


멀리... 진짜 푸른 하늘과 빙설처럼 눈부신 구름바다를 뚜렷이 나누는 雲平線, 헷세의 여름 구름이 생각난다. 풀밭에 누워 바라보던 뭉게 구름, 새털구름, 양떼구름들은 지금 시계접시처럼 오목한 지상을 덮은 채 폭신한 이불처럼 펼쳐있다. 이제 비행기는 엔진 소리만 요란한 채 멈추어 선 듯 미동도 없이 고요하다. 진한 향의 씁쓸한 커피를 마시며 운평선 위의 유리처럼 투명한 블루... 그 한없이 투명한 틈새를 바라본다.


다시 인천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의 시야에 방금 건넜던 긴 영종도 다리가 마치 현미경 속의 작은 크로렐라 한 마리 같다. 수중 미생물처럼 꼼지락거리는 지상의 작은 물체들이 멀어지자 시야는 순식간에 목화씨를 갓 털어낸 햇솜을 깔아 논 듯 몽실몽실한 구름뿐이다. 잠시 떠나온 쪽을 돌아다보니 주홍의 노을이 시작되고 있다. 붉은 산호 알처럼 명료한 태양이 긴 너울을 끌 듯 주홍의 광휘를 끌고 따라온다.


날개 끝에 달린 노란 표시등불은 별처럼 예쁜데 갓 뜬 초승달이 그 곁을 나란히 따라온다. 내 서창 방에서 보았던 온통 푸른 물병 속 같은 저물녘의 아청빛 어스름이 온 우주를 뒤덮는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빛의 노을 속으로 경계를 남기며 내게는 신작로에 어리던 신기루 같은 나라, 비안개 뽀얀 섬, 섬, 섬 列島를 향해 동해를 건너 나는 떠났다.


****

그 길은 아름답다

- 신경림  


산벚꽃이 하얀 길을 보며 내 꿈은 자랐다.
언젠가는 저 길을 걸어 넓은 세상으로 나가
많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가지리라.
착해서 못난 이웃들이 죽도록 미워서.
고샅의 두엄더미 냄새가 꿈에서도 싫어서.


그리고는 뉘우쳤다 바깥으로 나와서는.
갈대가 우거진 고갯길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이제 거꾸로 저 길로 해서 돌아가리라.
도시의 잡답에 눈을 감고서.
잘난 사람들의 고함소리에 귀를 막고서.


그러다가 내 눈에서 지워버리지만.
벚꽃이 하얀 길을,갈대가 우거진 그 고갯길을.
내 손이 비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내 마음은 더 가난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면서.
거리를 날아다니는 비닐 봉지가 되어서
잊어버리지만. 이윽고 내 눈앞에 되살아나는
그 길은 아름답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아니어서, 내 고장으로 가는 길이 아니어서
아름답다. 길 따라 가면 새도 꽃도 없는
황량한 땅에 이를 것만 같아서,
길 끝에서 험준한 벼랑이 날 기다릴 것만 같아서,
내 눈앞에 되살아나는 그 길은 아름답다.


2003. 8.3

푸른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