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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푸른샘135 달과 육 펜스 본문

깊고 푸른 샘

푸른샘135 달과 육 펜스

SHADHA 2004. 2. 14.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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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샘




<달과 육 펜스>

08/15







 

<달과 육 펜스>


비행기 좌석 포켓에 있는 책자와 신문 한 벌을 읽는 동안 어둠은 짙게 내린다. 바로 발아래 내 추상 속의 열기와 陰濕의 나라 그리고 하얀 눈의 나라. 雪國이 있다. 후지산, 아소산 등 크고 낮은 활화산과 기생화산을 거느린 오름의 나라, 지진의 나라가 점화된 불빛으로 가볍게 반짝이고 있다. 이전에 내가 아는 모든 섬들은 언제나 심해 속에서부터 용트림하는 뜨거운 그리움을 안고 있었다. 도달하지 못할 대상을 향해 끊임없이 갈구하던 벅찬 욕망을 끝내 억누르지 못하고 터져 버린 지표의 흉터가 있었다. 그 틈새로 얼간 아픔은 진액되어 흐르고, 숨어 일렁이던 슬픔은 뜨거운 한숨이 되어 하얗게 산화했다.


그러나 화산 재 위에 새 살이 돋듯 산허리에는 푸른 풀과 관목이 무성하다. 분화구를 청소하고 바오밥나무를 돌보던 어린 왕자처럼 바람에 긴 스카프를 날리며 일출과 일몰의 동쪽 나라를 바라본다. 자존심 강한 장미에 유리 덮게를 씌우듯 부끄러운 가시를 지켜줘야 하리라. 덮어두었던 애증의 어두운 그림자를 털어내고 뿌연 안경을 닦아 써야하리라. 너를 만나는 맨 처음의 감동으로 새로운 나를 네 안에서 개척해 가고싶다. 노을을 배경으로 나무의자에 앉아 있던 어린 왕자는 슬며시 사라지고 해안의 불빛 명멸하는 오사카 항구가 성큼 떠오른다.


간사이공항에 착륙하다. 지하철을 타고 남바역으로 이동한다. 남바역은 오사카 지하철의 중심 역이다. 그곳에서 바꾸어 타고 신오사카역 부근의 숙소를 찾아간다. 북쪽 출구 쪽의 7번 통로로 나가자 후끈한 열기가 얼굴을 덮친다. 머리 위로 교차되는 몇 개의 고가도로와 그 위로 차 구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24시간 마트 앞에 물건을 사러 온 여자에게 길을 물었다. 그녀는 타고 온 은빛 자전거를 길가의 보관대에 세워두고 자기가 추측하는 곳까지 달려가서 확인하고 온다. 뉴 오사카 호텔은 저기 있는데...


신(新)과 뉴(new)의 차이는 몰랐지만 그 친절에는 감동스러웠다. 잿빛 고가 도로 사이에 있는 호텔의 내부는 의외로 화사했다. 천정에 매달린 아름다운 자수정 상들리에와 에스카레이터를 타고 오르자 만나지는 석 점의 샤갈 수채화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 전형적인 샤걀의 그림에 나오는 날아다니는 소재들이 가벼운 수채화의 섬세함으로 도리어 유화보다 환상적이다. 로비 곳곳에 장식된 마티스 풍의 정물화, 유트릴로 풍의 일본 화가의 유화, 고갱풍의 세 나부의 그림은 미국의 유명 호텔들과 같이 높은 미술적 안목을 지닌 경영자를 인식하게 한다.


1028. 방은 놀랄 만치 조그맣다. 낭하의 마루판과 이어진 마루 바닥으로 된 4, 5평 크기에 꽉 끼인 침대 하나, 화장대와 의자 하나가 전부이다. 그러나 깨끗하고 깜짝 놀랄만큼 폭신한 백색의 양모 침구들이 맘에 든다. 욕실도 타이트한 구조이지만 비데와 욕조는 완벽하게 갖추고 있어서 기분 좋다. 첫날이라고 프론트에서 준 미용소금을 욕조에 풀어 발을 담그니 하루를 긴장하며 달려온 피로가 순식간에 풀린다. 그리고 시장기가 느껴졌다. 두 시간 거리라지만 저녁 식사시간을 굶겨서 내리게 한 ANA항공이 슬며시 원망스러웠다.


밖으로 나와서 마트에 들려 생수와 토마토 쥬스를 샀다. 1.5 리터의 생수가 2300원이다. 자세히 보니 불란서에서 수입한 물이다. 아무튼 비싸다. 집에서 먹는 제주 삼다수는 2리터 들이가 620원인데... 좀 더 사무용 건물 쪽으로 걸으니 코너에 밤새워 하는 우동집이 있다. 소고기 덮밥과 기스우동을 시켰다. 그는 미소시루 맛에 만족하고 나는 우동의 쫄깃함 면발과 깔끔한 국물 그리고 무엇보다도 난생 처음 맛보는 유부 맛에 놀랐다. 기름기 없이 튀겨진 쫀쫀한 두부살이 너무나 달고 고소하다. 아마도 이 맛은 아주 어려서 먹어본 아후라게 맛이 아닌가 싶다.


대학 은사님 중 일본에서 농학을 공부하신 콩박사님(강박사님)이 계셨다. 학부 때부터 내게 주입하고싶어 하시던 콩의 중요성과 콩에 대한 모든 것을 내내 시큰둥해하고 동물학 쪽으로 길을 들어서서 미움을 받았던 것 등이 마음 아프고 후회된다. 그러나 항상 일본에 외유가시면 편지나 소식을 주시고 삼십 여 년을 여전하게 지금은 남편까지도 함께 사랑해주시는 분이시다. 내게도 사표의 본이 되신 분, 항상 마음 한켠에 죄송함이 남게 하신 지극한 사랑이 기억난다. 지금부터라도 이곳 여행 중에 주로 콩 관련 식품에 유의해서 내 식생활에 접목하고싶다.


샤워 후 속옷과 양말을 빨아서 에어컨 바람 앞에 널었다. 모든 게 정말 미니멀하다. 그런데 주어진 일식 잠옷을 입어보니 너무나 길다. 허리띠는 어찌하는지 몰라서 태권도복의 띠를 매듯 허리에 두 번 감아서 겹매듭을 지으니 단단하게 배를 감싸주어서 좋다. 그는 슬며시 웃으며 도복입고 자는 여자는 첨 봤다한다. 아무튼 피곤한 몸이 포근한 이부자리와 만나니 바로 잠 속으로 깊이 떨어졌다.


*****


'써머셋 모음' 은 《달과 육펜스》에서 '육펜스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으면 결코 달을 잡을 수 없다'고 말한다. 알을 깨치지 못한 자는 결코 날아다닐 수가 없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자는 현재 자신이 속해있는 한 세계를 포기해야만 한다. 우리들이 속해 있는 일의 세계에서 탈출하여야만 유희의 세계로 들어갈 수가 있다.

육펜스는 일의 세계이고, 달은 유희의 세계이다. 그 길은 고통스럽고 험한 길이다. 그 길을 맨 앞장서서 걸어가야 할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들이다. 왜냐하면 앞으로의 세계는 바로 그 유희의 세계가 바로 현실의 세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현실은 초월한다. 그것은 항상 미래로의 새로운 길을 여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세계는 일의 세계에서 놀이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2003.8.3 밤

푸른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