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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푸른샘136 길 본문

깊고 푸른 샘

푸른샘136 길

SHADHA 2004. 2. 14. 16:33


푸른샘






2003.8.4









<무릉 가는 길>


새벽이면 항상 내 핸드폰에서 울려나오는 닭 우는 소리로 깨이곤 했는데 이곳의 아침은 희뿌연 창호 밖의 자동차 소리가 잠을 깨운다. 조반은 호텔 일층의 퓨전 식당에서 부페로 제공받는다. 그 많은 숙박객들이 쏟아져 나오니 다양한 식솔들의 소란스러움에 마치 미국식 Bed & Break 식 숙소에서 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화식과 양식을 두루 갖춘 여러 가지 요리가 준비되어 있다. 흰죽과 해조(톳)무침, 고등어 튀김과 계란 스크렘블, 과일과 커피로 넉넉히 식사를 해둔다.


첫 행선지는 奈良(나라)로 잡는다. 어젯밤부터 사용한 3일용 간사이 스루 패스권으로 일본 국철을 탔다. 처음으로 차창을 통해 일본식의 집들을 유심히 보게되었다. 작고 납작한 이층집들은 우리나라 60년대에도 흔했던 적산가옥을 닮아있다. 건축의 재료는 진갈색의 얇은 판자나 양철, 나무 쫄대의 격자 창으로 되어있다. 지진이 무서워, 땅의 신이 무서워 잔뜩 엎드린 겸허한 집의 모양은 내게 엷은 연민과 아픔으로 다가왔다. 부서져 내려도 최소한의 피해를 내려는 듯 가벼운 재료를 이용한 집의 모양은 허름하고 어두침침하다.


부끄러움도 모르는 듯 난간에 식구 수대로 몽땅 내다 널은 이불들만이 생활의 일단을 보여준다. 다다미방 위의 습기를 걷어내기 위해서일까? 우린 언제부터 이불을 내다 널지 않았을까? 우리나라 아파트의 베란다는 모두 유리와 샷시 처리가 되어있어서 이불을 널 수 있는 곳조차 감추어져 버린지 오래다. 아침 빨래가 가지런히 집게에 물려서 펄럭인다. 좁은 뜨락에 심긴 석류나 대추나무, 앙증맞게 작은 화분에 백일홍이나 제라늄 등의 붉은 꽃이 선명하게 피어있다. 잘 가꾼 향나무나 소나무 정원수도 보인다. 집들은 비좁아 터질 것 같아도 깔끔한 모습이다.


말이 없는 사람들. 모두들 침묵한다. 그러나 말을 시키면 친절하기 그지없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방법으로의 침묵일까? 마음 속을 알 수 없어서 무서운 것이 침묵이다. 힐끗 본 그들의 차림은 깔끔하고 단정하다. 대부분이 좋은 가방과 구두를 신고 있다. 더운 날씨인데도 까만 정장에 흰 셔츠 차림, 까만 서류 가방을 들고 있다. 문고판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열어서 누군가와 문자 교신을 하고 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외출 나온 젊은 엄마까지도 폰으로 게임을 하고있다. 외계인들처럼 말없이 자기 일에만 열중한 모습에 격리감을 느낀다.


나라역에 내리니 끼욱 끼욱하는 물새 소리가 기분 좋게 들린다. 그리고 곧 도착한 나라공원의 숲에서 쏟아지는 매미 소리... 소나기를 맞는 듯하다. 그리곤 까악 까악하는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린다. 어딜 가나 따라다니는 까마귀 소리는 나중에 환청이 되어서 들리게 된다. 法相宗大本山이라는 興福寺 입구의 산책로에 앙증맞게 예쁜 전화부스에서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동전으로는 되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꽃사슴들이 나타나 길손의 안색을 살핀다. 나무 그늘과 벤치가 있는 곳엔 아예 사슴 한 가족이 무리지어 앉아서 사진의 배경이 되어준다.


흥복사 국보관에 들어갔다. 그런데 전시된 불상들의 모습은 너무나 우리 것을 닮아 있다. 하기야 일본에 불교를 전한 것이 우리나라였으니까. 철불두상의 머리에는 동글동글한 구슬이 맺혀있고 미술 책에서 본 금강역사나 나한상, 아수라상은 너무나 낮이 익다. 그곳의 중앙에 모셔진 천수여래입상은 천 개의 팔을 가진 상인데 소위 그 손들이 가진 다양한 능력, 즉 全知全能함을 의미한단다. 석가여래좌상 앞에는 유일하게 복전함이 놓여있다. 우수로는 평안을 빌어주고 좌수로는 오가네(돈)를 요구하는 불상의 모습은 갈고리처럼 길게 구부러진 좌수의 중지로 인해 가히 희극적이다.


흥복사 本坊 절집은 서기 677년에 건립된 것이니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전래 받은 직후의 건축으로 보인다. 아무튼 잡신의 나라, 그들이 국교인양 내세우는 불교의 근원을 생각하며 잠시 우쭐한 기분이 되었다. 東大寺로 향하는 길가에는 타이트한 검은 바지와 근육질의 어깨를 자랑하는 청년들이 인력거 타기를 호객한다. 일인당 2만원 정도를 주면 10여분의 동대사까지 길을 인력거에 싣고 달려준다. 잠시 왕이 된 기분을 맛보고싶은 사람은 무릎에 붉은 덮개를 덮고 사진도 한 컷 찍어주는 그 호사를 누려볼 만 할 것이다.


東大寺 입구에 들어서면 꽃사슴이 너무 많다. 무엇이든 입맛을 다시고 있으면 졸졸 따라오며 얼굴을 디민다. 여기저기 발을 잘못 디디면 분변을 밟게된다. 꽃사슴이 앉는 모습은 특이하다. 먼저 앞다리의 무릎 관절을 뒤로 꺾어서 구부리고 납작 엎드리듯이 주저앉는다. 사슴 먹이용 센베가 한 봉지에 1500원이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할아버지의 좌판에서 슬쩍 훔쳐먹는 놈들도 있다. 사슴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비둘기떼가 따라다니며 주어 먹는다. 또 그 나머지는 참새가 주워 먹는다.


나라시대 성부천왕 때 창건된 동대사 대웅전에는 거대 철불이 있다. 철불의 좌대를 감싼 연꽃잎 한 장에 새겨진 문양의 섬세함과 절묘함에 놀라며 돌아본다. 12나한을 둥글게 거느리고 좌우에 여래상을 거느린 이 불상은 우리 경주의 석굴암 불상을 본뜬 것이라 한다. 주변에 흩어져 놓여있는 금물 칠한 와당이나 사천왕상 같은 것은 혹 우리 것 아닐까? 의구심의 눈길로 여기저기 둘러보니 그래도 나무로 깎아 입구에 세운 역사들의 키는 본 것 중에 가장 큰 규모이다. 나가는 길에 동대사 방문기념으로 부부용 젓가락 한 쌍을 사다. 위험을 제거하고 행운을 부른다는 염원이 나무젓가락 한 벌에 담겨있다. 어디가나 家內安全 交通安全이 주요 기원이다.


春日大社를 찾아 주차장 가까이 나가니 어디서 왔는지 70살 넘은 허리 구부정한 단체 손님들이 초등학생처럼 넉 줄로 맞추어 행진하고 있다. 그들 후미에 서서 따라가다 보니 입장료도 안내고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 50살이나 그들 70살이나 비슷하달 정도로 정정한 노인들은 지치지도 않고 계단을 잘 오른다. 이곳의 특징은 백일기도를 드리는 기도 도량인 것 같다. 수백 기, 수천 기의 석등이 이미 봉헌되어서 이끼와 양치식물들로 뒤덮여 있는데 복전을 내고 종이에 가족의 이름과 기도의 제목을 적어서 등에 붙이도록 되어있다. 또 백지를 사서 기도문을 적어서 그곳 발이나 오래된 나뭇가지에 묶어두기도 한다. 그래서 나무에 하얀 새처럼 붙어있는 것들은 다 기도문을 적은 쪽지이다.


흥복사의 샘물가에는 특이한 양철컵이 달린 물조리가 있었는데 이곳은 대나무 껍질을 둥글게 돌려서 만든 것 물바가지를 쓰고 있다. 우리나라의 일률적 플라스틱 바가지와는 다른 개성이 있다. 연륜을 자랑하는 해묵은 나무 등걸들과 그곳을 타고 오르는 아열대성의 넝쿨식물들, 이끼와 양치식물들의 우거짐으로 사의 역사가 오래됨을 넉넉히 알 수 있다. 주변의 우동가게는 기념품들도 팔고 있는데 대부분의 주인은 칠, 팔십을 넘긴 노인들이다. 그들의 들어오라는 손짓을 거절하기가 힘들었지만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를 탔다.


서너 시간을 쉼없이 걸었던 탓일까? 더위를 먹은 듯 답답하다. 나라 국철역 앞 작은 가게에서 모리소바와 초밥으로 식사를 했다. 소바 장국의 매큼한 무와 와사비 맛은 머릿속을 개운하게 해주었다. 물병에 냉수까지 얻어서 역 로비에 들어서니 이곳은 우리가 탈 수 있는 간사이 패스권 사용이 안 된다 한다. 중앙에 선 목없는 나이키 여신의 하얀 대리석 상만 쳐다보고 나왔다. 일본 사람들은 아무 관련없는 외국의 동상을 자기들 것 모양으로 세워 두고 무슨 중요한 의미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오사카의 우메다역에도 안데르센의 인어상이 상징이라나? 길거리에도 적잖은 브론즈 동상을 볼 수 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나라역 중에서 간사이패스를 쓸 수 있는 역으로 이동해서 교토로 향하다.


******


무릉 가는 길 1
     
  - 민영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정해야 한다.
가까운 길이 있고 먼뎃길이 있다.
어디로 가든 처마 끝에
등불 달린 주막은 하나지만
가는 사람에 따라서 길은
다른 경관을 보여준다.

보아라 길손이여,
길은 고달프고 골짜기보다 험하다.
눈 덮인 산정에는 안개 속에 벼랑이
어둠이 깔린 숲에서는
성깔 거친 짐승들이 울고 있다.
길은 어느 곳이나 위험 천만
길 잃은 그대여 어디로 가려 하느냐?

그럼에도 나는 권한다.
두 다리에 힘 주고 걸어가라고
두 눈 똑바로 뜨고 찾아가라고
길은 두려움 모르는 자를 두려워한다고
가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릴 거라고.

…… 한데, 어디에 있지
지도에도 없는 꽃밭
무릉(武陵)



2003.8.4 오전

푸른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