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광안리 수변공원의 작은 기적 본문
놀랍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떤 것이 기적인지 모르고 산다.
크고 작은 기적들을 그저 운이 좋은 탓이겠지라고 하거나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크고 작은 만남들과 상황들을 아무런 생각 없이 자가 필요에 의한 판단으로 기준한다.
어떤 것이 기적인지 모르고 살아간다.
1.
....전에 어디서?
.... 기억이 안 나나 보네.
.... 뵙기는 했는데,
.... 전에 요 아래서 커피 마신 적이 있죠?
.... 아! 네.
1년 전인 1997년 12월 31일 아침.
붉은 티셔츠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책하듯 새로 만들어진 수변공원으로 와서 길거리 커피를 마신 적이 있었다.
그 전날에 이미 지급하여야 할 자금들을 결재해 놓고 느긋한 마음으로 한적한 이 바닷가로 찾아와서
지나간 한 해의 마무리와 새로 다가올 새해의 구상을 하려고 했다.
신년 연휴는 다른 명절보다는 마음 부담 없이 편안한 휴식 기간이 된다.
크리스마스 이후엔 잠정적인 휴식기가 계속되기 때문이었다.
IMF가 왔다고는 하지만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다고 느꼈다.
회사 업무 상황으로 고정적인 대형 사업 프로젝트가 많아서 직원들 봉급은 충분히 확보되어 있고
운영만 잘하면 큰 무리 없이 잘 넘기고 오히려 새로운 개편으로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그 새로운 구상을 위한 상쾌하고 기분 좋은 아침이었는데..
종이컵에 커피를 건네주시던 할머니가 불쑥 한마디 건넸다.
... 사장님이죠?
... 얼굴에 사장이라고 써져 있습니까?
... 척 보면 알지, 식구도 꽤 많네
신기하고 재미도 있어서 생년월일에 태어난 시까지 알려주니
한참 눈을 감았다가 눈을 뜨며 한숨을 내쉬고는
... 사장님, 내년에 많이 힘들겠네, 사람 줄이고 돈을 움켜쥐소. 사업을 더 벌이면 큰일 나니까,
회사를 빨리 줄여야 살든지, 말든지 하겠네. 내 말 명심하세요.
이게 무슨 재수 없는 이야기인가? IMF 온다고 하니까 그냥 하는 이야기겠지.
커피 할머니의 이야기는 순간적은 불쾌감만 주었을 뿐, 머릿속에 오래 남지 않았고
수변공원을 떠날 즈음엔 수영만에서 광안리 바닷가 쪽으로 부는 겨울바람과 함께 그냥 지나가 버렸다.
2.
1998년이 시작되었다.
늦은 봄, 대형 사업장 정밀 세무조사를 받기 시작할 때부터 조금씩 무엇인가 꼬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야 기성금들이 국가 재정난으로 묶여 버리기 시작하면서 회사 재정에 붉은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여름부터 모든 설계비와 감리비마저 묶여 버려서 직원들 봉급이 밀리기 시작하였다.
늦가을엔 모든 것을 다 포기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태까지 왔으나, 갓바위와 영천 보살을 만나고 온,
특별한 계기가 있은 이후, 다시 용기 내어 하나둘씩 해결되지 않은 일들을 수습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가난해 질대로 가난해져 있었고 하루하루 버티고 사는 것이 곧 지옥 같았다.
그 겨울, 12월에 누가 그리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햇살 좋은 겨울 아침에
다시 수변공원으로 커피를 마시러 온 것이었다.
... 그래 어째 됐는가?
. 작년에 내가 말 한대로 하고 돈을 좀 챙겼소?
... 아뇨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 왜 내가 한 말을 귀 담아 안 들었소?
... 이 일을 우야면 좋노. 그래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이야기해보소
다 끝났습니다. 다른 회사들이 다 문을 닫아도 위리 회사만은 괞찮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하나가 묶이니 줄줄이 자금줄이 다 묶여버리고, 풀어내려고 몸부림쳤는데
해결될 듯 된 듯하다가 끝내.... 죄송합니다.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그래도 참 다향스러운 것은 1998년 겨울은 그리 매섭게 춥지 않았다.
... 작년에는 그리 자신만만해 보이던 양반이 어깨가 다 축 처졌네... 우야면 좋노.
... 어쨌든 가장 큰 고비는 넘겼고 몇 가지 더 수습하고 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준비를 해야죠.
... 사장님은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물에 빠져도 용왕님이 와서 건져주요.
... 제게 희망이 아직 희망이 남아 있습니까?
... 살아나요. 내가 보기에는 이제 고비를 거의 다 넘긴 것 같은데 다시 일어 설 꺼요, 크게 일어설 거요.
희망과 절망은
서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공존한다,
눈앞에 바라보이는 단순한 현실로는 절대적인 절망 상태라 하더라도
어떤 격려 한마디로도 머라 속에 잠재되어 있던 의식을 바꾸어 희망으로 변화된다.
참으로 순간적인 변화가 이루어져서 다시 큰 용기를 갖게 되었다.
매일같이 터지는 작고 큰 고통들과 절망감을 안고 수변공원으로 와서 길거리 커피 한 잔 마시고
늘 희망 가득한 얼굴이 되어 광안리 바닷가를 따라 집으로 돌아갔다.
.... 앞으로 다시 큰일 할 양반이 그게 뭐요. 어깨 좀 펴고 다니소. 춥지 않게 옷도 좀 두껍게 입고...
광안리 수변공원의 겨울 햇살은 따스했다.
3,
1999년 새해가 왔다.
비가 쏟아지는 날이나, 몸서리치게 추운 날이나 햇빛 따스한 날이나,
아침이든, 저녁때이든,
광안리 긴 해변을 걸어서
혼자,
때론 아내와 둘이,
때론 딸들과 함께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변공원을 찾았다,
그 후, 모든 일들이 한결 쉽게 풀려나가기 시작했고
해결되지 않았던 가장 일들이 하나, 둘 협상되고 원만하게 수습되고
그리고 지인의 도움으로 해운대 마린시티 <썬플라자> 오피스텔에 작은 사무실을 다시 만들었다.
... 그냥 내버려 두면 점점 커지는 암 덩어리를 고생스러워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고 생각하소.
이제 살아난 거지....
이제야 봄이 오려나 보다,
한쪽 공터에 노란 유채꽃이 현란하게 피었고
가로수에 연록빛 잎사귀가 돋아나기 시작하는 수변공원.
방파제 너머 푸른 바다가 초 봄 햇살로 하여 은빛으로 가득 부수어질 때
아주 오랜만에 여유로운 마음으로 커피 한 잔 마시며 한창 공사 중인 광안대교를 바라보았다.
..... 저 다리가 다 지어질 무렵, 저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 그때가 되면 사장님은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신나게 저 다리 위를 쌩쌩 달리게 될 거요.
그해 겨울.
햇살 밝은 광안리 수변공원에서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1999년<독백과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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