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샘
성탄절 素懷
12/25
성탄절 素懷
기독교가 주 종교인 서양 나라들의 큰 명절은 부활절과 성탄절을 낀 며칠간의 휴가라 합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성탄절에 전 국민이 함께 즐기고 축하하며 선물과 안부를 주고받는 일이 상례가 되었지요. 22일 밤엔 때늦은 밤바다를 걸으며 별빛을 찾다가 돌아와 피곤해 잠이 들었는데, 외지에 나가있는 큰애가 곧 터미널에 도착할텐데 버스도 끊어졌으니 데리러 오라는 전화를 걸어온 모양입니다. 엄마는 주무신다하면서 애들 아빠가 대신 마중을 나가는 모양입니다. 평소에 그런 전화를 걸어오면 호통이 대단하겠지만 명절이고 또 몹시 보고싶어하던 차라 반가운 마음에선지 선뜻 나갑니다.
나는 그날 오후부터 갑자기 오른 팔이 아파서 아주 고통스러웠습니다. 마침 그 날 낮에 컴에 매달려서 마우스로 오래 작업한 일이 무리를 준 것입니다. 작은애가 맛사지하고 파스를 붙여주었는데, 역시 비슷하게 아파 본 경험이 있는지라 지들 아빠보다 정확히 아픈 부위를 찾아내서 좀 수월하게 해주었습니다. 설풋 잠이 들어버린 때 큰애가 들어섰습니다. '엄마, 선물이요.'하면서 이부자리 곁으로 붙어 눕습니다. '선물? 뭔데...'하면서 겨우 실눈을 뜨고 바라보니 '아들이요.'하면서 너스레를 떱니다. '엄마 지금 아퍼, 죽겠다'하고 엄살을 떨며 밀어내었더니 '어디 아파요? 응? 돌팔이가 고쳐 드릴께요.' 하며 당장 아픈 곳을 잘도 찾아 주물러줍니다.
'저녁 아직 안 먹었지?'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가는데 '아니 제가 알아서 찾아 먹을께요.'하고 안심시켜 줍니다. 나는 순식간에 아픈 것도 잊고 다진 고기로 떡국을 끓여 참기름에 무친 신김치와 함께 식탁을 차립니다. 연신 '엄마 음식 솜씨가 최고야.'를 외치는 찬사 속에 '더 먹어라.' 다독이며, 과일에 녹차를 끓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눕니다. 작은애의 방학생활에 대한 걱정까지도 큰애는 순식간에 풀어줍니다. 제가 데리고 가서 학원에도 보내고 함께 있겠다나요. 지난가을 내내 의약분업으로 수업을 미루었다가 이제야 몰아서 하는 공부가 벅찰텐데 동생을 염려하고 내 걱정을 벗겨주려는 마음이 고마울 뿐입니다.
벌써 두시가 넘었는데도 지 동생과 컴 주변에 앉고 서서 이것저것 가르켜주기도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너무 다정하게 보이며 온 집이 꽉 차고 훈기가 넘치는 것 같아 참 행복해졌습니다. 이것이 가족이 모이는 기쁨인 듯하다며 내일 장 볼 것들을 적고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가만히 애들 방을 열어볼 때 그 천진하게 잠든 얼굴들이 어려서나 지금이나 어찌 그리 예쁘기만 한지 슬며시 미소가 흐릅니다. 낮에는 네 식구가 함께 실내 수영장에 가서 오랜만에 실력을 겨루어 보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배워서 잊지 않고 또 몸매가 날씬해서인지 우리 부부보다는 가볍고 날쎄게 앞서는 두 놈들과 한참 물에서 놀았더니 배가 고팠습니다. 집에서 하는 음식으로 먹자는데 동의해서 빠르게 할 수 있는 요리감들로 양상치와 등심을 넉넉히 사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큰애에게는 약간의 고민이 있었더군요. 전날 해부학 시간에 8분 지각을 했는데 여자교수님이 문 밖에서 더 이상 다른 애들 못 들어오게 지키라고 했다나요. 울컥하는 마음에 문짝을 차버리고 나올려다가 어쩌면 엄마도 그렇게 깐깐할 꺼라는 생각이 들어서 꾹 참고 도서관으로 올라갔답니다. 물론 문을 지키라는 명령은 묵살했겠지요. 그리고 아직 풀리지 않는 응어리가 있어서 답답한 채 집에 왔던 것입니다. '그러면 안되잖아요, 공부하려 온 학생을 쫓아내는 건 선생이 아니지요. 물론 늦은 건 잘못이지만 한 시간 수업을 못 들으면 얼마나 손핸데... 엄마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알아, 나도 너희들 때문에 차마 못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
우리는 함께 큰애의 레포트 쓸 자료를 찾았습니다. 제목은 <생체 재료의 종류와 그 임상응용>이더군요. 마침 애들 아빠는 치과 재료 개발로 논문을 쓴 재료공학 전공이고 나야 인체생리학을 전공하며 임상을 가르치고 있으니 우리 애들로 말하면 바이오세라믹 제품들이지요. 그러니 인공 치아나 인공 혈관, 심장, 관절, 피부 등의 응용과, 재료로는 대별되는 무기질 재료와 유기질 폴리머에 대한 것은 알만했지요. 방대한 양을 찾아 놓고 보니 제출할 것은 기껏 A4 용지 석장 이라나요. 대충 써브타이틀만 잘 고르도록 하고 맡겨두었더니 밤중에 이메일로 제출했더군요.
이브의 주일 아침에 우리는 함께 교회에 갔습니다. 밀린 잠을 자고플텐데도 벌떡 일어나 씻고 나서는 두 장정들을 앞세우고 나서는 일은 몹시 자랑이 됩니다. 어쩌면 지금의 이런 행복이 여자의 일생에서 맛보는 정점의 행복 아닐까 생각하며 감사하기도 합니다. 곧 각자의 길로 흩어지고 또 각자의 여인이 생기면 어머니의 자리는 어디쯤 설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어느새 성탄을 지내고 간다던 큰애는 주일 오후에 바로 가겠다고 합니다. 이브의 밤을 함께 놀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어쩌면 분노하고 좌절해서 집으로 와버린 그 애의 마음을 다독이고 달래서 원 위치로 불러 올리는 어떤 현명한 여자 친구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낍니다. 나도 그 길이 그 애의 갈 길임을 인정하기에 점심을 먹여서 터미널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서 오는 길은 언제나처럼 몹시도 허전하고 쓸쓸합니다.
'00.12.25
진눈깨비 치는 성탄 오후에 푸른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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