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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푸른샘68 오늘도 야자수 나무 아래 누워 본문

깊고 푸른 샘

푸른샘68 오늘도 야자수 나무 아래 누워

SHADHA 2004. 2. 12.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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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샘




오늘도 야자수 나무 아래 누워

12/31








- 오늘도 야자수 나무 아래 누워


저 따스한 常夏의 나라 말레이지아를 떠돌며 즐겨온 12월이 오늘로 마지막이군요. 좀 검어서 매력적인 이슬람 여인의 옷자락, 과일이 풍성한 시장의 풍경과 호사스런 호텔 주변 경관으로 눈길은 휘황했지만, 마음은 슬프고 아쉬운 인도양 물길 속을 헤매고 있었지요.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는 선험자들의 충고를 새기면서도 잃은 것에 대한 고통이 못내 크기만 한 것은 우리 모두 한낱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이겠지요.

컬럼지기님, 오래 함께 해온 분신과 같은 친구를 떠나보내면서도, 빠짐없이 칼럼을 지켜주신 그 우아한 슬픔에 깊이 위로 드리며, 철없이 누려온 행복한 여행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누구에게나 희망 찬 모습이었던 밀레니엄의 한 해가 저물고, 이제 새로운 21세기의 시작, 또 한 세기의 첫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내일을 희망적으로 느끼지 않는 것은, 저 추악한 정치와 탐욕의 거대한 도박장 같은 주식시장의 폭락이 던진 그림자 탓이겠지요. 하지만 작은 곳에서 찾아지는 기쁨, 조금씩 이루어 가는 보람에 마음의 중심을 두고,, 오늘 조금 남은 세모에 고요한 혼자만의 시간에 젖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며칠 전 가까운 친구에게서 질 좋은 호미 한 자루를 선물 받았습니다. 허리가 구부러져서 몹시 겸손해 보이고, 한 손에 잡혀서 몹시 만만해 보이는 가장 작은 농기구 하나, 그러나 날카롭지만은 않아 주걱처럼 긁어모을 수도 있고, 조금씩이나마 땅을 파내려 갈 수 있는 기능이 다양한 것이지요. 그런 보랏빛 호미날 하나에 나는 희망을 겁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어떤 합리주의자의 명언이 아니라도 우린 또 한 걸음씩 성실히 걸어가야 하잖아요.

그래서 누구나 마음에 옥탑방 하나 두고 깊은 사유의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해맑은 시간들이 더 많아지는 새해이기를 기대해 봅니다. 한 은둔자의 노래를 읽으며 내 마음으로나마 가까워지고 싶었던 여러 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보는 밤입니다.

이 겨울에 선운사에서 만나고싶은 하얀새님, 항상 당당한 처녀 줄리아님, 좋은 글로 탄복케 하는 배영아님, 멋진 선비같은 실한님, 우아한 여인 Grace님, 깍쟁이 keith님, 컴 실력 대단한 한바다님, 참 좋은 노래로 사로잡던 꽃누리님, 여리디 여릴 것같은 하늬님, 톡톡 튀는 빵울님 모두의 이름을 이렇게 야자수 나무 아래 누워 별 반짝이는 밤하늘에 써봅니다.
더불어 이 방의 여러분 모두의 새해가 스스로의 기쁨으로 가득하시길 빌고 있습니다.


<미공미급>

명산은 터잡아 살 만하지 않다.
조그마한 산이 겹겹으로 둘러싸이고 숲이 무성하게 우거진 곳에
나아가 땅 두어 이랑을 개간하고 초가 삼간을 짓는다.
무궁화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만들고, 띠를 엮어서 정자를 만들며,
한 이랑에는 대나무를 심고
또 한 이랑에는 꽃나무와 과일나무를 심으며,
그 옆에는 오이와 채소를 심는다.
이리하여 네 벽은 맑게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데,
두메에서 자란 아이를 시켜 채마밭에 물을 주고 잡초를 뽑는다.
그리고는 의자 한 두 개를 정자 밑에 놓고는
책과 벼루를 끼고서 한가로움을 벗삼고,
거문고와 바둑을 가져다가 좋은 친구를 부르며,
이른 새벽에 말을 채찍질하여 나갔다가
해 저물어 돌아오곤 하면
이 또한 늘그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은둔의 즐거움 25


'00.12.31
감기로 꽁꽁 얼어버린 푸른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