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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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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샘

푸른샘104 여름일기-모기처럼 날아 태양처럼 쏘는 정오

SHADHA 2004. 2. 14.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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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샘




여름일기-모기처럼 날아 태양처럼 쏘는 정오

08/24





 

모기처럼 날아 태양처럼 쏘는 정오에


어머님 산소는 문중 산의 조금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도 너른 앞 들내가 훤하게 보여서 가슴이 탁 트이는 전망 좋은 곳입니다. 달리는 도중 가느다란 실비가 내려서 일을 못하나했더니 큰애는 도리어 이런 날이 좋다고 기어이 해버리자 합니다. 시아버님 산소의 대나무를 치는 일이며 추석 전 벌초하는 일엔 먼저 나서는 품이 억지로가 아니라 제 의무로 당연시하는 것 같아 너무 고맙기도 합니다.

일옷으로 갈아입는 사이에 까만 숲모기가 무수히 달려들어 금새 차안에 가득합니다. 혼자 남아서 책이나 읽겠다던 계획은 틀어져버리고 우산을 들고 아들 뒤를 따라다니며 모기를 쫓아주는데 연한 살에 어느새 툭툭 붉히며 자국을 내어 놉니다. 이웃 묘의 일가친척이 조금 거들어 논 끝이라 대충 흉내만 더하고 어머니 묘비 곁에 보랏빛 부처 꽃무더기는 베지 말고 그냥 두자고 말렸습니다. 금새 끝내고 나왔지만 온 식구가 모기에 물린 자국을 벅벅 긁으며 서둘러 아들의 원룸으로 향했습니다.

애가 사는 주택가 고즈넉한 동네에는 깔끔하고 아담한 한정식 집이 더러 있습니다. 샤워한 후 늦은 점심을 하자고 찾아가니 광복절이자 말복 날인데도 휴일이어선지, 시간이 늦어선지 한가롭게 쉬고 있습니다. 키 큰 후박나무, 모과나무 어깨 아래로 뜨락에 하얀 수선화 비슷한 꽃들이 비에 젖은 채 함초롬이 피어있습니다.  

고가를 개조해서 만든 이 집의 구조는 좀 특이한 일본식 이층인데 건축의 재료는 모두 나무인지라 관심이 가서 둘레를 살피며 음식을 기다렸습니다. 창문은 나무문이지만 다시 바깥에 샷시를 대어서 방범을 하고, 대나무 울은 그 뒤로 쇠울을 대어서 든든히 했더군요. 나무의 목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문살이나 마루, 장식으로 놓인 반다지나 목가구들을 살피며 오래 전 관심 밖에 두고 식물 분류학을 소홀이 한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목수 김씨는 이따금 필요한 나무를 점 찍어두고 그걸 구하려 갈 때면 아버지를 앞세우고 나섭니다. 동네에서 말발이 서는 위엄있는 아버지를 둔 재주 많고 예의 바른 아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나도 우리 아버지가 그리 해주실 분이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그만 눈자위가 부풀어버립니다.

우리 아버지는 평생 내 것이 아닌 것은 갖지도 않으시고 또 뇌물같은 것으로 남을 사는 것을 가장 싫어하셨습니다. 당시 기독인들이 흔히 선점하는 구호물자, 밀가루 한 포대를 받아두었다가 아버지께 눈물이 나도록 혼나고 돌려주는 어머니의 쳐진 어깨가 지금도 기억나지요. 뿐만 아니라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표어는 문지방 기둥마다 붙어있었지요. 나중에 가나안 농군학교에 가보니 아버지와 교분 있으신 그 김용기장노님의 모토이기도 했더군요.

그런 아버지가 딱 한 번 무릎을 꺾듯 뇌물을 내놓은 적이 있었는데, 어린 딸이 공부를 다 했다고 낙향하고는 날마다 코 빠뜨리고 딩굴고 있던 암울한 시절이었지요. 한 동네에 살던 뽐뿌집, 사글세방도 놓던, 수학 선생님이 돈을 모아서 학교재단을 설립했는데 추진 중에 돌아가시고 그 부인인 누구엄마, 정말 이웃집 아줌마가 재단 이사장이 되었지요. 그 길을 뚫는데 당시로는 쌀 두 가마니 값을 어머니께 내주신 것이지요.

어머니도 좀 자존심 상해하시면서 그 돈으로 힘을 썼는데 난 한 학기 시간 강사로 다니곤 그만 잘렸지요. 임용이 결정되자 마자 때늦을세라 결혼을 해치웠고 두 시간거리의 통학이 힘겨운 중에 첫애를 가졌으니, 이래저래 다니기 힘든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문교부엔 전임으로 올리고 월급은 시간으로 지급한 그 작태는 결국 몇 곱의 뒷 탈을 맞았지요.  

개학 준비를 하겠다는 큰애를 떨쳐두고 무등산 쪽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담양족에 있는 외가에 가려면 시내를 관통하기보다는 산길이 덜 막히고 운치도 있겠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능소화 소담하게 흐드러진 담장의 집들을 부러워하며 들어선 구불구불한 드라이브 길은 금새 울창한 소나무, 밤나무들로 아득합니다.

항상 가까이 있어서 좋은지는 알았지만 더운 여름 날 들어선 산속은 초록의 나무들로 서늘한 그늘이 져서인지 촉촉한 한기가 등을 타고 흐르며 금새 땀을 거둬 갑니다. 길가엔 한창인 목백일홍의 붉은 꽃을 무수히 만나고 보니 그 중에 약간 보라색 혹은 분홍색인 것도 있더군요. 몸피 굵은 플라타나스도 가끔 있는데 김씨 말대로 정말 수피가 예비군 군복처럼 얼룩덜룩합니다. 보기 드문 은백양나무 이파리들의 하얀 뒷면이 바람에 반짝이는 것도 오랜만에 만나고 보니 과연 산은 수목원처럼 다양합니다.


'01.8.24

어머니의 산에서 푸른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