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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푸른샘103 여름일기-젖은 구름 고요한 아침 본문

깊고 푸른 샘

푸른샘103 여름일기-젖은 구름 고요한 아침

SHADHA 2004. 2. 14. 12:05


푸른샘




여름일기-젖은 구름 고요한 아침

08/23







젖은 구름 고요한 아침에..


아직 시내를 달리는 중 친절한 택시 기사가 뒤 바퀴에 바람이 빠졌거나 펑크라고 일러주고 갑니다. 부득이 카 센타에 들려서 확인을 하고 바람을 좀 넣고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나는 오늘의 택스트로 들고 나온 <목수일기>를 읽습니다. 차창가에 앉아서 책 읽는 것은 별 꾸중하지 않고 잠잠히 운전해주는 그가 항상 고맙습니다. 뒤에 탄 아들도 <싸이언스 올제>라는 번역 잡지를 읽고 있습니다.

목수일기의 작가 김진송씨는 국문학과 미술사를 공부하고 얼마 전부터 나무로 작품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합니다. 우연히 그가 연 세 번째 목수김씨전에 다녀 온 후, 그 범상치 않음을 알아보았고 바로 그의 작품과 글 세계에 공감하게 되었지요. 책은 그의 세 번째 작품전에 나왔던 작품들을 만드는 배경과 생각들이 아주 편안하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가 나무를 구하다가 만나는 헌 판재의 글씨를 읽어내는 능력을 보면 그가 재능을 겸비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게 합니다. 물론 이미 그의 저서가 서너 권이 있으니 그는 단순한 목수이기만 한 것은 아니지요. 그 글씨를 옮겨 볼까요? 世事琴三尺 生涯酒壹杯  西亭江上丹 東閣雪中梅 -세상일 거문고 소리에 묻고, 삶은 술 한잔에 취하네. 서녘 정자는 강 위에 붉은데, 동쪽 누각에 설중매가 피었구나. -  그 글씨를 판자에 새긴 이는 오십 여 년이 지난 후에 이렇게 읽어주고 곱새겨주는 이를 만났으니 구천에서도 기쁨이 있겠지요.

나는 그의 전시회에서 처음 나무들의 속 살결을 만나서 너무나 경탄스러웠는데 그의 책에서는 갖가지 나무들의 체취에 대한 설명이 있어서 또한 일독할만 했습니다. 미학을 아는 이가 맡는 테레핀향과 환경학자가 말하는 키톤치드 이상의 木質의 냄새를 느끼면서 말입니다.

그는 축령산이라는 산아래 집을 가지고 사나봅니다. 마당엔 산벚나무 몇 그루를 심어두고 꽃을 보기도 하고 까치를 맞기도 하면서, 그런데 아내가 있습니다. 그 아내가 버찌를 따달라고 하면 어김없이 담장에 올라가서 까치보다 먼저 챙겨내야 하는 지아비의 역할을 착실히 하기도 합니다. 한번은 아내의 생일 선물로 좀 큰 체리나무를 사다 심었는데 일년만에 죽었다는군요.

체리를 좋아하는 아내라... 체리와 버찌가 어찌 다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저 어릴 적 들었던 <체리 핑크 엔 애플 블러썸 맘보>인가 하는 금관악기로 연주되는 호방하고 낭자한 멜로디는 어렴풋이 기억나는군요. 제목이 맞나 불확실해도 멜로디는 확실히 기억납니다. 그들 부부도 그런 곡에 맞추어 춤을 추는지 몹시 궁금하면서요.

버찌 따주는 남편이라... 지난 봄에는 유난히도 봄이 새로웠습니다. 그 속에 피어나는 꽃들도 시시로 왜 그렇게 아름다운지 매화를 보고나선 산수유, 개나리와 벚꽃을 보고나선 진달래, 줄장미, 등꽃과 라일락 그리고 녹음 후에 목백일홍, 자귀나무, 이제는 가을꽃들로 이어지고 있군요. 참, 벚꽃이 꽃잎을 한 장 한 장 날리며 져버린 오월 어느 날인가 다시 유명한 벚꽃 터널쪽으로 나갔습니다.

해묵어 몸 굵은 나무는 이제 잎사귀 무성한데 길가에 차를 멈추고 가지를 당기며 무언가를 따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버찌를 따나부다하고 그도 차를 그늘에 들이대고 내리자 합니다. 한차례 손아귀가 지나간 후라 낮은 가지엔 드물지만 키 큰 그가 가지 끝을 당겨서 내려주는 곳엔 검은 버찌가 알알이 여물어 있습니다. 떨어지거나 손가락 끝에 뭉겨지면 영낙 핏빛 눈물로 남고마는 버찌의 짙은 자주색을 알기에 조심스레 따서 입에 넣었습니다.

벚나무 흰 꽃 이파리가 낱낱이 떨어지는 것도, 바람에 날려서 구르다 물 웅덩이가에 박히는 것도 다 쓸쓸한 정경이었지만, 마른 아스팔트에 뚝뚝 떨어진 버찌가 차 바퀴아래 뭉겨져서 붉은 혈흔처럼 오래 남겨진 길을 지날 때면 누군가의 잃어버린 순결같아서 마음 처연히 슬퍼졌습니다. 그래서 버찌가 지천인 학교 뒷길을 걸으면서도 부러 따먹지 않았고 그렇게 떨어져 터진 알갱이들을 애써 외면했었는데...

세월은 이제 건조하고 거칠어진 여인의 마음에 미각에 대한 탐심만을 남겨 놓았나봅니다. 새콤한 듯한 맛을 지나 달고 향기로운 과일의 맛은 순식간에 목젖을 넘어 사라져버리고 아쉽고 애틋한 마음에 작은 씨앗을 후 멀리 뱉어냅니다. 그날 우리는 한참동안 풀밭에 서서 버찌를 따서 배불리 요기를 했습니다.


'01.8.23

꽃은 열매로 남는 날, 푸른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