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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푸른샘107 여름일기 -핏빛 노을을 토하는 석양 본문

깊고 푸른 샘

푸른샘107 여름일기 -핏빛 노을을 토하는 석양

SHADHA 2004. 2. 14.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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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샘




여름일기 -핏빛 노을을 토하는 석양

08/27






 

핏빛 노을을 토하는 석양에


배산임수의 넓은 들판을 지녀 마냥 부유했던 이 동네의 고샅이 언제부터인가 퇴락의 쓸쓸한 그림자를 지웁니다. 대부분이 도회로 떠나버리고 노인이나 낙향한 자식이 쓸쓸히 남아서 농사를 힘겹게 짓는 까닭입니다. 그래도 담 아래 쭉 고르게 심긴 봉숭아가 겹꽃을 피우고 채송화도 애잔히 노란 꽃을 보여줍니다. 고샅길에는 풋감이 떨어져 딩굽니다.


외숙모는 며칠 앓았다며 더욱 여위어 뼈에 피부만 남은 손을 내밉니다. 온기조차 없는 마른 손입니다. 수십 개 광 열쇠를 주무르던 종가손부의 말년이 가슴 아픕니다. 마루에 앉아서 마당에 심긴 잎맨드라미를 보았습니다. 아직 꽃은 피지 않고 어긋나기로 돌려난 잎사귀들은 노랑과 빨강으로 선명해서 예쁩니다. 전에는 그 잎을 얹어 화전을 부첬다기에 몇 장 따서 넣었습니다. 동서는 우리가 받을 곡수인 쌀을 집 방아로 찧어준다고 서두릅니다.


텃밭에 나간 외숙모가 부추 한 바구니와 부추 뿌리 한 봉지를 파다 줍니다. 슬쩍 용돈을 조금 드리자 자신의 처지를 슬퍼합니다. 자식들이 모두 여유롭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도 다 자란 손자들을 그저 모셔두고 절대 일을 시키지 않는 양반 댁 가풍입니다. 돌아가신 외숙의 평생도 흙 한 번 손에 묻히지 않고 머슴들 부리며 뒷짐만 지고도 잘 살았답니다. 그러나 이젠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아시는지...


마당에 연분홍의 꽃무더기가 환하고 아름다워서 가까이 가보니 상사화 꽃대가 먼저 올라와 한 가지에 일곱 송이씩 통꽃을 불어대고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못 보던 것인데 지난봄 외숙이 돌아가신 후 남겨둔 혼백이란 말인가? 잘 골라서 배치된 수석 사이로 잘 손질된 소나무, 모과나무 분재도 알맞게 자리잡은 조선식 정원이 감나무, 포도나무와 어울려 보기 좋았습니다.


겹봉숭아 꽃을 따고 씨를 받아서 종이 봉지에 담고 쌀 두 가마니를 얻어서 돌아옵니다. 아직 해는 높이남아서 그는 장모님 계시는 곳에 들리자 합니다. 오 일팔 묘역 뒤로 오르며 어제 서울에서 내려와 가까이 있을 막내 동생에게 어머니 산소로 나오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이미 친정이 사라진 우리들은 이렇게 산소에서 만나는 것이 가장 마땅한 방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올 때마다 느끼듯이 높긴 하지만 구름이 손에 잡힐 듯, 너무 맑은 자리에 누워 계신 어머니 봉분에 또 쑥이 불쑥 자라있습니다. 아침엔 시어머님 산소를 손보았는데, 그는 또 모시 웃옷을 벗어두고 호미로 장모님 묘소의 쑥을 뿌리째 깊이 파냅니다. 저만큼 가서 황토를 파다 비닐봉지로 날라서 개토를 합니다. 곱게 자란 새 잔디를 떠다가 얹고 꾹꾹 밟아줍니다. 금방 작은 봉분이 오독하니 올라서 보기에 좋아졌습니다. 그 높은 곳에서는 정말 하늘이 너무나 가깝습니다. 어머니에게 혹은 하나님에게 작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해가 뉘엿 기울자 새털구름, 양떼구름 뽀얗던 하늘이 서서히 붉은 빛으로 잦아듭니다. 요 근래 보지 못하였던 황홀하도록 타는 핏빛 붉은 낙조가 가슴 쓰리도록 아름답게 물듭니다. 그제야 나타나는 동생네 가족, 머뭇거리는 것은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에 대한 막내딸의 그리움인줄 아는 까닭에 어린 두 조카를 재촉해 데리고 서둘러 하산합니다. 요즘 모기가 너무 무섭다고 핑게해 봅니다.


동생네 시댁 부근의 음식점에서 중복 음식으로 삼계탕과 갈비살을 먹었습니다. 근무하던 대학을 재주 좋게도 서울로 옮기게 된 제낭이 이런저런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엊그제 다녀온 두 조카의 필리핀 선교 이야기랑 유학 계획을 듣다가 헤어져 돌아옵니다. 어두운 하늘엔 다 달아진 초생달만이 외롭게 떠서 쓸쓸한 내 마음의 차창가를 지켜줍니다.


'01.8.27

또 어머니 생각을 하며 푸른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