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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푸른샘109 아픈 그대에게 무엇을 보내리 본문

깊고 푸른 샘

푸른샘109 아픈 그대에게 무엇을 보내리

SHADHA 2004. 2. 14. 12:17


푸른샘




아픈 그대에게 무엇을 보내리.

09/22









아픈 그대에게 무엇을 보내리.


음악이 향기처럼 흐르는 곳에 선 채로 짙푸른 末茶 한 잔을 마십니다. 어제의 석양이 지구의 심장을 뚫고 되돌아 온 듯 은빛 실크의 구름을 이끌고 아침은 우아하게 밝아옵니다. 계절의 향기 깊어진 구월에 茶香은 비강을 지나 목울대를 넘으면 이윽고 유리병처럼 투명한 가슴속을 온통 바닷빛으로 채우고 맙니다. 그 바다처럼 푸른 숲에 수천, 수만 송이의 꽃들이 붉은 별처럼 내려앉은 선명한 영상이 꿈속까지 밀려와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相思花 지천인 용천사 길을 나란히 걸어준 그대여...
그 붉고 푸름이 한 뿌리에서 함께 돋아난 자웅동체의 운명이 아니기에 그토록 서러웠단 말인가요. 울긋불긋한 단청으로 새로이 단장하여 생경한 절집 그늘도 어제는 아프도록 푸르고 붉었습니다. 그래선지 시간의 물살이 거꾸로 흐른 듯 현란하게 바뀐 모습이 그다지 서글프진 않았습니다. 고요히 삭아 내린 듯 처연했던 그 옛날의 풍경이 그대 마음속에 아직 고스란히 보존되어 풀려 나오고 있었으니까요.


어느 해 가을, 사납게 비 뿌리던 길을 흠뻑 젖어서 달려갔지요. 저물녘에야 겨우 찾아냈던 그 곳의 기억이 이제껏 마음의 습지에 번지는 發墨의 아련함으로 그대 모습까지 담아서 우러납니다. 비에 푹 젖은 낡은 선방은 비어있고 모기장 속에 흰 홋니 이불이 아프게 눈에 박혔지요. 대나무 마루 위로 학승이 쓰다둔 대학노트 하나 무심히 뒹굴고 있었지요. <眞兒를 찾았나요?> 노트의 물음에 말없이 눈 돌린 마당 한가운데는 철 늦게 남아버린 단 한 촉의 꽃대만이 눈부시도록  빨갛게 피어있었습니다.


앞산엔 안개비가 곱게 내리고 황토와 장작의 훈향이 낮게 덮이는 산사의 선방 앞 대나무 마루는 그저 서늘하도록 또렷한 가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바라본 한 송이 상사화, 그토록 절절한 기다림은 두 번 다시 보지를 못하였습니다. 꽃은 힘이 아니라 위로라 하였지요? 달빛에 씻기고 바람이 빗질하여 꽃 그림자조차 삭아버린 세월이 흘렀는데도 마음에 스미고 번지어 안개 밖으로 선명히 드러나는 그 옛날의 꽃을 그대 앞에 다시 그려보았습니다.


상사화 함께 본 이여... 가을에 시작된 사랑은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봄날의 덧없음과 여름의 絶命함을 깨달아버린 사랑은 엄숙하고 관조적이기에 결코 뜨겁지 않습니다. 단련된 한 인간의 영혼에서 파편되어 그대 가슴에 떨어진 사랑은 고요한 식물성의 사랑입니다. 뿌리는 저 깊은 소에서 길어 올린 삼투된 물을 마시고 안개 낀 새벽의 목소리로 낮게 노래합니다. 줄기는 대지의 굴곡을 깨달았고 섬세한 가지들은 광막한 밤하늘과 그 속에 새겨진 빛나는 별들을 알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그대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한 마리 벌새가 되어 잠들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잎새 안의 온기는 새가 잠들기에 충분하고 가지 위의 수액은 새가 노래하기에 충분합니다. 잠들고 노래하는 새의 생애처럼 본디 자유는 그대의 유전이었습니다. 운명의 고리에 꿰이고 마법에 혼미한 악령의 시간이 지난 오랜 후에, 드디어 새는 나무를 위해 가슴깃털에 남긴 열정으로 일출을 부르고 일몰을 사위겠지요. 향기로운 나무의 숨결 따라 날개짓하여 떠돌며 夢遊의 그대는 始原의 힘을 되찾을 수 있겠지요.


아직도 온기 남은 그대가 앉아있었던 빈 의자를 향해 선풍기가 돌고있습니다. 자연이 녹아있는 저 내면의 풍경으로 당당히 그대를 소환하여 사랑의 증인으로 세울 때까지 그 그림 속에는 서늘히 바람이 불고 새가 노래하고 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그대 모습은 언제나 투명하고 화려하지만 또 그렇게 경박하지 않아서 아름답습니다. 그대는 중국의 철학자처럼 때로 한 눈을 뜨고 꿈을 꾸겠지요. 그 꿈속에서 함께 할 맑은 사랑과 감미로운 풍자로 엮어진 삶은 더 이상의 환상이 없기에 환멸도 없고 오로지 몽환의 쾌미만이 가득하리라....


그러나 아직도 밭은 나의 고독한 영토입니다. 가장 손쉬운 농기구, 호미 하나가 병약한 손가락과 무릎을 따라 낮게 기어다닙니다. 내 삶 깊이 숨은 뱀과 두더쥐가 다니는 토굴로는 침묵과 안도의 한숨이 꿰어 지나갑니다. 그 마른 흙 위로 내 영혼은 올해도 실팍치 못한 씨앗이 되어 뿌려졌습니다. 간절함과 쓰라림과 따뜻함 그리고 쓸쓸함과 떨림과 애틋함이 골고루 파종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을 내 미력한 간척의 토양 위로, 부실한 産卵을 따라, 어렵사리 소유된 언어의 실과들이 차마 오르지 못한 채 그대의 식탁 아래를 부끄러이 맴돌고 있을 뿐입니다.



 '01.9.22

 가난한 마음으로 푸른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