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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푸른샘123 벽오동 심은 뜻은... 본문

깊고 푸른 샘

푸른샘123 벽오동 심은 뜻은...

SHADHA 2004. 2. 14.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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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샘




벽오동 심은 뜻은...Re:소형 디카와 함께하는 경부선 열차여행

05/26






 


벽오동 심은 뜻은...



일상을 벗어나 열차를 타고 확 트인 차창에 기대앉으면 달리는 속도만큼 빠르게 시간의 단층이 벗겨진다. 공간의 자리바꿈인데 왜 항상 시간이 역순으로 흐르는 듯한 혼미함에 빠질까? 터널을 드나들며 만나는 숲에는 당당하고 키 큰 오동나무 꽃이 아름답다. 山形의 수형을 균형잡아 대칭으로 세우고 수 백 개의 촛대를 추켜든 듯 의연한 보랏빛 오동꽃은 가까이 다가가면 향기도 아름답다. 딸을 낳으면 시집갈 때 가져갈 농장을 마련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심었다는 벽오동나무, 나무 결에는 매듭 하나 없고 하얗고 매끄럽기가 어린 딸의 살결만 같다.


산사의 입구나 트래킹 숲길의 어귀에서 만나는 오동나무 꽃은 항상 봄비에 촉촉이 젖어있다. 아직 시들지도 않은 채로 뚝뚝 떨어진 꽃송이들을 보노라면 아버지의 투박하고 성실했던 손바닥처럼 너부데데한 잎사귀의 내부음 같은 바람이 두텁게 불어온다. 딸의 탄생부터 딸을 여의기까지... 벽오동나무의 가지는 발 많은 우산처럼 넓게 펼쳐져서 귀 기울이고 딸의 소리를 듣는다. 딸의 재잘거림, 소꿉놀이 대화, 비밀스런 고백, 첫사랑의 설레임, 나무는 딸의 이력서처럼 딸을 따라서 성장한다.


아버지는 일년에 두어 차례쯤 서울 회의 참석 차 올라오셨다. 그리고 항상 무교동 부근 유명한 갈빗집으로 불러내어 기숙사 밥에 곯은 딸에게 비싼 갈비를 사주셨다. 마치 어린 딸의 먹을 것을 구해주시려는 듯한 모습을 뒤따라가노라면 심봉사가 동냥젖을 구하는 듯해서 부끄럽고도 눈물겨웠다. 아마도 아버지들은 다 그런가보다. 지금은 큰애를 향한 애들 아빠의 사랑이 울 아버지와 무척 닮아있음을 느낀다. 한번 외식으로 쓰는 돈은 한 주일치 넉넉한 용돈이기에 예전에 큰애는 항상 사양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빠의 심정을 고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성숙되어 보인다.


오동나무 잎새 위로 굵게 빗방울 듣는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잤더니... 내 긴 꿈을 길어 올리듯 두레박을 던진다. 지상에 떨어져 누운 별빛처럼 아름답게 수놓인 베갯머리 꽃수엔 금실과 은실이 반짝인다. 아무도 깨우지 못할 딸의 꿈을 아버지는 용서하신다. 아버지는 눈을 감고 잠을 주무시듯 모른 척 하신다. 손바닥 위에 두 발을 모아 잡고 꼰지꼰지 어르던 그 어린 딸의 모습만을 기억하신다. 딸이 사는 세상과의 경계에 서서 아버지는 오동나무처럼 홀로 외롭고 홀로 그리워하며 홀로 서럽다. 오동잎 지는 밤까지...



2003년 오월

아버지를 그리며 푸른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