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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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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샘

푸른샘139 꽃은 길 위에서 피지 않고

SHADHA 2004. 2. 14.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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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샘




<꽃은 길 위에서 피지 않고...>

08/22










<꽃은 길 위에서 피지 않고...>


오사카 역전 엑티브 백화점의 8층, 식당가에서 점심을 먹다. 어제 쓰리던 위를 달랠 겸 그가 자세히 물어서 게살과 죽순이 듬뿍 든 달걀죽을 시켰다. 3대째 이어져온다는 이 집의 음식은 모든 국물이 각기 다른 맛으로 감동적이다. 음식을 맛보며 감동이라니... 그러나 일본에서 감동할 것은 아마도 특유의 친절과 정성이 깃든 음식의 맛인 것 같다. 따스한 푸른빛의 오차 맛까지도 지하철에서 에어컨에 얼은 몸과 마음을 포근하게 풀어준다. 기운을 차리고 오사카성을 향해 102번 시영버스를 타다.


드넓은 오사카 공원 안에 자리한 성은 大手前(오데마에)역에서 하차하여야 한다. 성은 넓은 수로를 건너서 커다란 돌(46톤인가 96톤인가의 큰)로 성문을 쌓은 곳을 지나야 한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먹으며 걷노라니 성 앞에 다다른다. 콘 껍질을 버릴 때까지 바라보고 따라 온 지독히 천박한 비둘기 떼에게 질린다. 검고 큰 고양이만 한 까마귀도 사납기 짝이 없다. 항상 살벌한 울음소리를 뿌리고 있다. 성의 초입 쪽 역사 박물관이 있는 곳에 만들어진 알록달록한 작은 꽃밭이 유일한 화사함이다. 서울에서 온 상냥한 두 명의 여대생을 만나서 화단을 배경으로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헤어졌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는 유난히 서울에서 온 단체 관광객이 많다. 오층의 성까지 오르는데 요금을 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걷는 일이 싫어서 안내표시판 앞에 앉아있었다. 그곳에서 가이드를 따라 모이는 팀이 있다. 가만히 들어보니 일본에 온지 두 번 째 날인데 버스로 이동하면서 조금씩 구경하는 것이 그저 그렇나 보다. 아들내외를 따라온 장모와 시어머니가 내게 말을 건넨다. 나오니까 좋은데 조금만 구경하고 그저 쉬고 먹는 즐거움을 기대하고 있다. 허기야 나도 그렇다. 성벽을 따라 한참 산책로를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우메다역에 돌아왔다.


그는 인천 공항 면세점에서도 기어이 비싼 코우치 핸드백을 사주더니 여기서는 세이코 시계를 사란다. 전자 상가에 들려서 시계전문점에 갔다. 세이코 시계는 그가 결혼 전에 사두었다가 프로포즈하는 날 주었던 은색의 타원형이 처음이었는데 결혼 후 오, 육년 되어서 잃어버리자 다시 출장 길에 금색 팔각형의 것을 사다주었다. 그것도 십 여년을 쓰다가 두 해 전에 물이 스미면서 밧테리가 자주 방전되어 못쓰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 기념으로 세 번째 세이코를 사주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 상가는 구형만 있나 옛날 내 시계 모양들이 그대로 있다. 그것도 역사이고 전통이란 말인가?


대형 서점을 물어 물어서 찾아갔다. 紀伊國屋書店이라는 한 블록을 다 차지하는 초대형 서점이다. 가는 길에 고가 아래의 노숙자들이 머무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종이박스로 얼기설기 방을 만들어서 사는 사람, 그곳에 이런저런 악세서리를 주어다가 치장을 한 사람, 무언가를 내다 파는 사람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노숙하는 이들이 구멍 속에 숨어있었다. 저 불빛의 화려함 아래는 이런 누추한 삶도 있구나... 뉴욕의 할렘가에서 느끼던 섬짓한 두려움보다는 애처러움이 들었다. 한 블록을 다 차지하는 서점에서 전문 서적 코너를 찾아낸 그는 또 번역할 전공 책 하나 찾으라고 성화다. 책값이 너무 비싸서 망설이다가 겨우 가벼운 문제집을 한 권 골랐다. 이것도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큰짐이다.


지하철을 타고 서중조남방역을 지나 강을 건너서 집처럼 익숙한 신오사카로 돌아온다.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서 부은 다리와 발을 씻고 저녁 먹을 곳을 찾아 나섰다. 그는 바로 옆집 식당에서 우나기 축제라고 가자하지만 난 첫날 먹었던 기스우동의 유부 맛이 그리워 그곳을 고집했다. 유부는 여전히 맛이 있고, 그가 택한 냉 소바에 따라나온 진초록의 라임 반쪽은 즙액을 짜서 비비니까 기가 막히게 향기로웠다. 간단한 길거리 우동집이 제공하는 싸구려 맛이겠지만 좋은 추억이 되었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거리를 걸으며 라임 즙을 짜서 햇볕에 탄 팔에 문질렀다.


그는 오사카의 마지막 밤인데 기어이 우나기 집에서 맥주 한 잔 하고 제대로 객고를 풀잔다. 바깥에서 볼 때는 아무 소리없이 냉랭하던 가게가 들어가 보니 웬걸 퇴근길의 셀러리맨들로 왁자지껄하고 열기가 넘친다. 아니 저들이 아침 전차에서 과묵하던 사람들 맞단 말인가? 여러 가지 색깔이 든 맥주를 한 잔씩 놓고 먹기보다는 떠드는 것에 열이 났다. 아침에 호텔식사에서 먹은 찐 두부도 맛이 있어서 이곳에선 冷媒라는 얼음물에 담근 생두부를 안주로 시켰다. 나무쪽으로 엮은 작은 술통같은 것에 담겨온 생두부 4쪽을 간장에 와사비와 무 간 것과 우나기 껍질 구운 것을 섞어서 찍어 먹는다. 게눈 감추듯 먹고 나니 나머지 맥주는 혀끝에 감도는 상상의 안주로 마셔야 된다.


엷은 녹차빛의 맥주를 우나기 구이 안주에 천천히 마시며 피로를 푼다. 음식이 담긴 그릇마다 각각 너무 예뻐서 하나 슬쩍하고싶다 했더니 유리 유약칠의 그릇 만드는 법을 설명해준다. 내일은 삿뽀로행 비행기를 타야한다. 멀지않은 곳까지 걸어가서 간사이공항 나가는 공항버스 타는 곳과 시간표를 알아두고 돌아오니 잠이 쏟아진다.

*****



   -김영석


길은 없다
그래서
꽃은 길 위에서 피지 않고
참된 나그네는
저물녘
길을 묻지 않는다.


2003.8.5.오후


푸른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