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샘
<파란 휘파람 소리>
08/20
< 파란 휘파람 소리 >
아침은 또 다시 새로운 필터를 갈아 끼운 것처럼 상쾌하다. 식사 후 神戶(고베), 明石(아카시), 姬路(히메지)를 향해 나서다. 이제 우메다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맑고 깨끗한 강을 건너 西中島南方역이라는 곳을 지나가는 일은 마치 한강교를 지나 강남으로 출근하는 일처럼 익숙해졌다. 특급 한신 전철로 아예 히메지역까지 쭉 달리기로 한다. 가는 길은 계속 해안을 지나며 시원한 바다와 등대를 보여주기도 하고 보통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역시나 작은 이층집엔 아침 빨래가 널리고 요들이 커다란 집게에 물려 걸쳐있다.
좁은 공터에 가까스로 주차된 작은 차들은 대게 하얀색이다. 고가의 전자 제품을 사용하며 작은 집에 만족하는 일본인의 소박한 삶의 태도는 아무래도 자연 환경의 탓이리라. 그러나 공장 주변을 지나며 공터에 세워진 수백 대의 자전거를 보면 대단한 저력을 느끼게 된다. 좁고 자원이 적은 나라에서 절제와 검약으로 다져진 국민성이 때로 필요할 때 힘을 모으는 엄청난 단결력의 근원은 아닐까? 호박 넝쿨이 우거진 담장, 토란잎이 무성한 밭과 집 곁에 잔디밭처럼 곱게 자란 벼들을 보며 우리와 다름없는 농촌의 소박한 모습에 안도하기도 한다.
아침 전철에서 출근하는 사람들은 다 내려버린 시간, 나이든 노인들만이 한가하게 졸고 있다. 마르고 등이 굽은 노인, 그러나 세월의 험한 물살이 다 비켜간 듯 낙천적이고 순진무구한 표정이다. 굽은 등은 도리어 당당히 살아온 자신감과 쉽게 꺾이지 않는 고집처럼 보인다. 작은 분재처럼 앙상하게 가꾸어진 외모에 일본을 이끌어오고 지켜갈 힘의 근원을 느낀다. 비슷한 나이또래의 우리 부모님이 전쟁과 가난으로 힘들어 할 때 저들도 패전의 아픔을 겪었으련만...
히메지역에 내려서 십 분쯤 걷는 길은 커다란 은행나무로 제법 울창하다. 그러나 길 양쪽으로 나뉘어 심긴 커다란 가로수 아래 보도는 새의 분변으로 지저분하다. 머리 위의 새 똥을 주의하라는 경고판이 여기저기 붙어있다. 낮엔 숲으로 날아간 새들이 아마 밤이면 음식물을 찾아 도로변의 가로수에 깃들이나보다. 어떤 새들이 떨어뜨린 것인지 길바닥은 온통 치약처럼 굳어진 똥이 말라서 가루되어 날리는 것만 같다. 아마도 이 사람들이 길조라고 사랑하는 까마귀나 비둘기이겠지.
히메지성은 가장 오래된 성이자 가장 규모가 큰 성이기에 찾아가는 사람도 많다. 그는 가는 길에 일본어를 잘 하는 중국사람을 만나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요즘 배우는 중국어를 써보느라 정신이 없다. 전국에서 가장 기온이 높은 곳일까? 성까지 걷는 길도 먼데 성은 지하부터 8층까지 계단으로 되어있어서 주어진 줄을 따라 계속 올라야한다. 창문이라고 우리 시골방의 밀창 정도밖에 없는 성 속을 계속 오르다보면 원치 않는 뜻밖의 사우나를 한 것처럼 푹 젖게된다. 그러나 아무도 짜증스런 표정이 없다. 독일어를 쓰는 한 그룹도, 중국의 배낭족들도, 일본의 가족 여행 팀도 다 묵묵히 더위를 견디며 걷는다.
지하 이층과 지상 6층의 꼭대기 방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지붕 위의 금물 씌운 문장을 사진에 담는다. 이또오 히로부미의 여인인 羽姬가 화장하던 방을 들여다보니 여가에는 시녀를 두고 화투 패를 떼고있었나 보다. 밀납으로 만든 인형 두 개가 있을 뿐이다. 내려오면서 연신 頭上注意 표지판을 읽고 머리를 수그려야 한다. 나무 마루와 계단의 성이다. 주변에는 물 내려가는 수로와 주방의 수세 물과 변이 버려지는 통로가 있다. 방문객의 신발을 벗어서 담고 다니던 비닐봉지조차 다시 재생해서 사용하는 그들의 검약정신에 놀라다.
성을 나서며 매점에 들려서 에어컨에 몸을 식히고 '午後의 紅茶'라는 달콤한 홍차 한 병으로 갈증을 달래며 산요 전철에 오르다. 갈 때 보았던 수국이 피어있는 작은 집을 다시 보며 의자를 뒤짚기도 싫어서 거꾸로 달린다. 달리아와 능소화가 핀 집도 있다. 석류나무에 석류꽃이 열매로 바뀌고 있다. 제라늄꽃이 유난히 붉다. 갑자기 바다가 나타나며 아사이 해협의 긴 교각이 보인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탄성을 지르며 내다본다. 고베 역에 내려서 점심을 먹고 고베 타워와 고베 해양박물관을 보고 갈 것인가를 의논한다. 다리와 발이 너무 부어서 걷기가 싫다. 그래서 볼만한 곳,모 노마치나 산노미야 부근을 그대로 다 지나간다.
달리는 산요 특급 고속전철은 특이하게도 마치 증기기관차처럼 삐익 삐익하는 희미한 휘파람 소리를 낸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을 잊고 망연히 듣게된다. 저기 납골을 모신 돌비석 무더기 옆에 작은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우리 재단 병원이 확장하는 장례식장 옆의 아파트 공사장에 붙은 격렬한 항의 현수막이 생각난다.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특성일까? 그들은 영혼을 아는지 모르겠다. 남의 어깨 너머로 잠시 보이는 매일경제신문에 현대의 정몽헌이 도비? 몸을 날렸다고? 한국 경제가 어떻게 되는거지? 아니 남북경제협력은 물 건너간단 말인가? 떠나온 우리나라가 전쟁이라도 당한 듯한 과도한 불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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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가는 휘파람 소리
-고형렬
누가 사는지 알지 못하는 서울 화곡에서 김포 하성이나 강화 양사까지 조용한 식목일 근처, 봄날 저녁의 길 멀리서 들리는 휘파람 소리는 누구의 파란 휘파람 소리였던가
나 또한 중도에서 그 소리를 따라가지 않고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왔지만 내가 따라가다 돌아온 줄 모르고 그 휘파람의 주인공은 정처없는 봄의 운행을 계속해갔다
다만 나는 이제 고백할 뿐 정말로 그 휘파람 소리를 따라가고 싶었고 올해도 그 휘파람의 등뒤 가까이까지 다가가 천천히 걷고 싶었다고
그래서 얼마를 뒤따르다 더 어두워져 그도 나도 어느덧 함께 걸어감을 그때 혹시 알게 되었을지 모르겠다고 하성 산길이나 양사 바닷물처럼 조용하게...
2003.8.5
푸른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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