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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Julia78 페르시아가 낳은 영상의 마술사 본문

Julia Heart의 추억

Julia78 페르시아가 낳은 영상의 마술사

SHADHA 2004. 3. 1.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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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aHeartz



페르시아가 낳은 영상의 마술사

09/25








▶▷키아로스타미◁◀  124  
이 글은 출처는
[ 20세기 중동을 움직인 50인],
손주영 외 지음, 가람기획 출판사, 2000에서 발췌했습니다.
제가 일일이 타자로 치느라고 죽을 뻔 했습니다.
제 칼럼에 올렸던 글인데 여러분도 읽어보시라고 올립니다.




                                                 페르시아가 낳은 영상의 마술사
                                                                       .          
                                                                       .  
                                                                       .  
                                                                       .  
                                                   키아로스타미
                                                 (Abbas Kiarostami, 이란, 1940~ )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만들어낸다(He makes something out of nothing)." 서구 영화 평론가들이 이란이 낳은 영화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비평하면서 한결같이 내뱉는 말이다. 혁명과 테러로만 연상되는 이란에서 서구인의 상상을 깨고 우수한 영화들이 출품되자 세계 영화인들이 크게 놀란 것도 사실이다. 그것도 판에 박인 물질주의적 서구식 영화가 아닌 동양적 사고와 명상을 배경으로 하는 '키아로스타미 식'영화를 창조해냈다는 데에 영화 비평가들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키아로스타미 자신은 이 모든 것이 페르시아 문화의 소산이라고 자신있게 답하고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내 영화들은 페르시아 문화의 심장에 뿌리 박고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원천을 찾겠는가. 나는 서방측이 내 영화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려드는 그 배경을 이해는 한다. 최근 수년간 서구 언론에
  의해 이란이 연관된 것으로 보도된 일련의 테러나 폭력사건 때문에
  이란의 이미지가 폭력적으로 비쳐졌다고 생각한다. 서방은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명은 무시하고, 관심있는 사항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다른 두 개념 사이에 놓인 그들 자신의 갈등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내 영화는 페르시아의 오랜 문화적 전통에 뿌리박고 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태어난 문화를 벗어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키아로스타미는 1940년 이란의 테헤란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18세에 미술 공모전에 수상한 바가 있는 키아로스타미는 교통 경찰청의 사무직에 13년간 근무하면서 주경야독으로 테헤란 대학 회화과에서 시각예술을 전공했다. 졸업 후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광고분야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했다. 광고 및 포스터 디자인, 동화책의 삽화 등의 제작이 주를 이루었지만, 광고 필름의 타이틀 제작 일을 맡으면서 붓과 화폭이 아닌 카메라와 필름을 통한 영상예술이라고 하는 새로운 분야를 발견하다. 그가 1960년부터 1969년까지 제작한 광고 필름만 150편이 넘는다. 또한 젊은 시절에는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로셀리니를 비롯한 신현실주의 영화들을 즐겨 관람했다. 이처럼 키아로스타미 광고 필름 타이틀 제작이라는 직업적 경험과 영화감상이라는 개인적 취미를 통해 미래의 영화 거장으로서의 자질을 축적해나갔다.

키아로스타미가 본격적으로 영상예술에 전념하게 된 것은 1969년 이란의 청소년 지능개발연구소가 영화제작부를 신설하고 그를 이 부서의 창설 멤버로 초빙하면서부터다. 이 연구소에서 그는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어린이들의 교육과 환경에 대한 관심은 이 후 그의 작품세계의 주괸 화두로 자리잡는다.

이 연구소 영화제작부의 첫 작품이 서정적 단편인 '빵과 골목'(1970)이며 이 영화의 연출과 감독은 키아로스타미에게 맡겨졌다. 한 소년이 하교길에 친구들로부터 방해를 받자 갖고 있던 빵조각을 나우어주면서 통과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 속에는 이미 앞으로 키아로스타미가 추구할 영상 예술의 특성이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즉, 즉흥 연기,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적절한 조화, 대화보다는 침묵을 통한 호소가 이 작품 전반에 걸쳐 꾸준히 흐르고 있으며, 실생활의 생생한 리듬을 갖춘 사회적 주제가 예술가적 시각으로 다듬어져 한 편의 서정시나 담백한 수채화처럼 관객에게 선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그만의 독특한 영상처리 기법은 그 이후 대부분의 그의 작품에서도 꾸준히 이어져 키아로스타미의 전배특허가 되었다.

청소년 지능개발연구소의 영화제작부는 키아로스타미 덕분에 이란 영화의 산실이 되었으며, 키아로스타미 역시 초기에는 주로 어린이들을 소재로 한 영화를 제작했다. 첫 작품인 '빵과 골목'이외에도 단편영화 '쉬는 시간'(1972)과 중편영화 '경험'(1972), 그리고 사춘기 시골 소년의 반항적 기질을 그린 그의 첫 장편영화이자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여행자'(1974)가 모두 어린이들의 학교와 가정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점이나 갈등을 다루고 있다.

'빵과 골목'을 제작한 이후 약 30년 동안 키아로스타미는 아동용 단편영화, 픽션 장편영화, 다큐멘터리 장편영화, TV 연속극 등 20여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그러나 그가 세계 영화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부터이다. 그를 일약 스타의 반열로 올려놓은 작품 '친구 집은 어디에'(1987)는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청동 표범상을 수상했다. 얼니 소년 아흐마드가 자신의 단짝 남자친구의 집을 찾아나서면서 펼쳐지는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이란의 사회적 현실과 기성세대의 어린들에 대한 무관심을 고발하고 있다. 고발성 작품성임에도 불구하고 미학적인 화면구도, 간결한 대화가 휴머니즘을 조용하게 호소하고 있다.

이 작품은 '그래도 삶은 계속되고'(1992), '올리브 나무 아래에서'(1994)와 함께 소위 '지그재그 3부작'이라고 일컬어진다. 세 영화의 배경에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혹은 모두가 이란의 코케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코케 3부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또한 이 세 작품은 키아로스타미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작품들로서 한결같이 세계영화제에서 수상하거나 주목받은 작품이기 때문에 서구 비평가들은 "지구를 울린 3부작"이라고 평하고 있다.

이 세 작품은 또한 연작의 성격을 지닌다. 키아로스타미가 '친구 집은 어디에'를 발표해 세계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후, 3년 뒤인 1990년 이 작품의 촬영지였던 이란 북부의 코케 마을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당시 독일을 방문 중이던 키아로스타미는 이 영화에 출였했던 어리이들의 생사가 염려되어 곧 귀국한 후 카메라를 들고 이 마을을 찾았다. 그는 지진 피해현장과 복구장면을 카메라에 만든 후 이를 영화화했다. 그래서 탄생한 작품이 '그래도 삶은 계속되고'이다. 영화 초반부는 지진 참사를 복구하는 이란인들의 모습을 단순하게 영상에 담았다. 여기까지는 보도 필림에 불과한 다큐멘터리이다. 그러나 갑자기 상황이 픽션으로 반전되어 영화감독이 '친구 집은 어디에'에 출연했던 아역 배두들을 찾는 내용으로 변한다.

이 영화는 1992년 칸 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수상했다. 지그재그 3부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인 '올리브 나무 아래에서'는 앞의 두 작품에 나왔던 아역 배우들이 성장항 후에 남녀간에 사랑을 주제로 다루었다. 이 영화에서 키아로스타미는 특이한 구성을 시도했다. 즉, 영화를 찍으면서 영화에 출연할 현지인들을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구성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다양한 상황에 처해 있는 이란 인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 작품 역시 1994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 후보에까지 올랐으며, 같은 해의 상파울로 국제영화제에서는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키아로스타미 자신이 가장 아끼던 작품은 '클로즈업'(1990)이다. 이 작품은 가난한 실직자이자 영화광이었던 알리 사브지얀이 이란의 유명한 영화감독이었던 모흐센 마흐말바의 행세를 하다가 고소당했건 실제의 사건을 극화한 것이다. 이 영화 역시 전반부는 키아로스타미가 사브지얀을 만나 그의 인생역정을 영화화하겠다고 허락하는 과정부터 재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구성했으며, 후반부에 가서 사브지얀의 사기행각의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실제로 사브지얀은 출소한 후에 키아로스타미의 도움을 받아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고 전해진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자살을 주제로 다룬 '체리 향기'(1997)에서 완숙한 경지에 이르러 결국 1997년의 칸 영화제에서 이 작품으로 황금 종려사을 수상했다.
그는 스스로가 시나리오를 써서 연출 및 감독을 맡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동료나 제자에게 시나리오를 써주어 이 작품들이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자신의 조수로 일하던 자파르 파나히에게 써준 '햐얀 풍선'(1995)은 칸 영화제에서 신인 감독상에 해당하는 황금 카메라상을 수상했으며, 이브라힘 포르세시에게 써준 '열쇠'가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황금 표범사을 수상한 경우가 좋은 예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자신의 영화에 비직업 배우를 자주 출연시킨다. 글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을 데리고 자주 즉흥연출을 시키기 때문에 다쿠멘터리를 연상시키지만, 그렇다고 기록영화는 아니다. 키아로스타미는 그래서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이나 프랑스의 시네마 베리테의 정수를 보여준 그의 연작은 유럽의 다큐멘터리식 영화와는 또 다른 새로운 경지의 '마음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영화보다는 현실을 더 중시하는 그의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이란의 실제 풍경 속에서 이란 사람들이 늘어놓은 삶의 체험을 절묘한 리듬으로 재배치해놓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의 영화와 서구 영화 스타일의 차이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영화가 대부분 실화에 기초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특징은 맛깔스럽게 포장한 낭만이 없다. 그저 삭막한 이란 농촌풍경만을 강하게 풍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풍경 속에서는 조용한 서정적 운율이 흐르고 있다. 이것이 키아로스타미식 영화적 화법의 특징이다. 또한 그의 영화에는 결론이 없다. 그는 "감복이 할 일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일 뿐"이라고 잘라 말하며, 관객이 영화를 보고 왜 그럴까 의아해하며 헤매기를 원한다. 그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말을 인용해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면 차라리 우체국에서 가서 전보를 쳐라"고 주장하면서,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을 북돋워주는 것으로 만족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서 현실 뒤에 가려진 현실을 보여주길 원하며, 그의 여화가 가지는 가장 큰 힘과 감동은 순수한 눈을 통해 대상을 바라보며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간직하게 한다는 점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를 '발명'해냈다. 서방세계의 영화가 점점 더 테크놀러지의 수사학에 의지하고, 그것을 측량하고 기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환상에 빠져 있는 동안, 그는 그것을 단숨에 부정했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항상 불완전하다. 영화가 하나의 완결된 텍스트가 되어 그것을 해석하고, 주석 달고, 다시 설명하는 것을 단호히 거절한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진행 중이며, 과정을 지켜보도록 유도한다. 그래서 그는 '완성'으로서의 텍스트를 '과정'으로서의 이미지로 옮겨놓는다.
키아로스타미는 영화 바깥에서 시작해서 영화 내부로 이동하고, 다시 그것은 다음 영화로 이어지고, 전제조건이 되어, 이제 그의 영화는 언제나 끝이 없는 시작의 순환고리처럼 이어져 있다. 그는 죽어가는 영화, 점점 기계화되는 영화에 그것을 만드는 숨결을 불어넣은 것이다.

                       


▶관련 글을 쓰려고 자료를 찾다가 정말 운좋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자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어느 훌륭한 영화 잡지보다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너무 기쁩니다.
그가 외국에서 교육을 얼만큼 받았는지 확실히 알수는 없지만 이란에서 교육받고 스스로 많은 노력을 쏟았기에 지금의 감독의 자리에까지 갔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란 영화 전체가 훌륭한 것이 아니라 몇몇 뛰어난 감독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한국 또한 마찬가지겠지요. 한국영화가 모두 훌륭한 것이 아니라 몇몇 영화가 훌륭한 것이겠지요.
그 수많은 경쟁을 뚫고 뽑힌 시나리오 중에서도 단 몇개만이 훌륭하다고 평가 받으니까요.

키아로스타미를 이란감독이라고 부르지만
이란감독이 모두 키아로스타미 같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전체 속에 개인이 속하고
그 개인이 전체를 대변해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전체가 개인이 될 수 없으며
개인이 전체가 될 수 또한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