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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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告白과 回想

개성공단으로 떠나기 앞서

SHADHA 2008. 8. 8. 18:20

 



개성공단으로 떠나기 앞서

유배지로 떠나는 마음





   세상을 살다보면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이 생기기도 한다.
   지금 내게 그런일이 생겼다.
   거부하고 싶어도 거부할 수 없는 상황,
   싫어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

   그동안 우리 회사에서 개성공단에 몇개의 공장을 설계하고 감리를 해서
   두개의 공장은 준공을 하여 가동을 하고 있고, 두개의 공장이 다시 건립되고 있다.
   그동안 개성공단내 공사의 감리는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감리자 지정만 해놓고
   한달에 한 두번 당일치기로 올라가서 현장점검하고 내려오는 것이 관례였고 그렇게 해왔었다.
   약 한달전 내가 개성공단에 갔다올 때 내 이름으로 감리자 지정을 하고 돌아왔었다.
   그동안 감리자로 지정되었던 직원이 건축사 시험을 치기위해 사직했기 때문에
   고급 기술자 자격 이상이 되는 기술자를 다시 지정하여 감리지 변경을 해야 했는데,
   당장 그런 기술자를 구하기도 어려워서 특급기술자에 해당되는 나의 이름으로
   감리자 변경을 개성공단에 가서 하고 돌아 온 것이였다.
   그때까지는 개성공단에 상주하지 않고 가끔 한번씩 올라가서 점검만 하면 되기에 그리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감리자로 지정된 사람이 개성공단에 건물이 준공될 때까지 상주를 해야한다고 한다.
   난감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개성공단에 상주할 고급기술자를 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설사 구한다 하더래도 감리자 변경을 하는데까지 약 한달이라는 시간이 요구되는 상황,
   빨리 기술자를 구해서 감리자 변경을 할 때까지
   최소한 한달 이상은 내가 올라가서 상주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회사는 파트너 C소장이 지키고 있으니 그리 큰 문제는 없으나 내게는 참으로 낯설고 당황스러운 일이다.

   직원생활을 끝내고 경영자가 된 지 20년.
   그동인 감리전문회사 대표이사로서, 건축설계사무실 대표 건축사로서 20년을 사는 동안
   우리가 설계한 현장이나, 감리를 맡은 현장에 이따금씩 들려 직원들 격려하고
   현장에 문제점은 없는지 확인하고 돌아오는 것이 내가 현장에 가서 하는 일의 전부였다.
   이번처럼 내가 현장 감리실무자가 되어 현장에서 상주하며 실무를 하는 것은
   이번 개성공단이 첫경험이 되는 것이기에 당혹스럽기만 하다.
   일도 일이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해외출장이나 여행으로 잠깐 떠나있은 적도 있었고,
   업무상 시외 출장으로 하루 이틀 사무실과 집을 비우고 떠난 적은 많으나,
   이렇게 아예 한달이상 장시간을 가족들을 떠나 멀리 떠난 적이 없었다.
   더우기 집에는 아내와 큰 딸 두사람만 남겨놓고 가기에 마음이 더 아리다.
   나도 그렇지만 가족들에게도 이번 경험이 처음 겪는 일이라 더욱 그렇다
   하여 업무상 깊은 내용을 모르는 가족들이나 주변사람들은 내가 개성공단으로 가서
   상주하는 것에 모두 반대를 하고 나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설명해야했다.
   더우기 지금 북한과의 관계가 최악인 정치적 상황에서 어떤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더욱 더 반대가 심하기는 하나 가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핸드폰도 가지고 갈 수 없고, 국제전화로 주간에만 업무전화만 할 수밖에 없고,
   인터넷도 아직 개설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고,
   황량한 공장부지에 공장들과 빈 땅만 널려있어 갈 곳도, 산책 할 곳도 없는 곳.
   아는 사람도, 같이 대화할 사람도 없는 곳,
   가장 괴로운 것은 바쁘게 일 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두군데 현장을 돌아보고 설계도에 맞게 공사하고 있는지
   확인만 하고 나면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괴로울 것이다.
   인터넷이나 되면 부산에서 하던 업무를 거기서도 연계하여 할 수도 있을텐데..
   노우트북을 들고 가서 일을 할까 하였으나 무용지물일 것 같아 그러지 않기로 했다.
   또 사실 요즘은 부산에 있어도 그리 바쁘게 할 일은 없기도 했다.
   하여 몇가지 조금 더 공부할 책을 들고가서 그 빈 시간들을 메꾸기로 했다.

   소설책도, 잡지도, 신문도 가지고 갈 수 없는 땅. 개성공단.
   황량한 그곳은 자유인인 내게 거의 유배지나 다름없는 곳이기도 하다.
   한달 이상의 유배생활.......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일정 조정을 하면서
   매주 금요일 오후 3시반에 개성을 떠나 서울로 와서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가
   화요일 오전 7시 30분에 개성행 버스를 타고 개성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했다.
   매주 부산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지극히 피곤한 일이여서 부산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격주로 한번은 그냥 서울에 머물고 한번은 부산으로 내려왔다가 돌아가는 일정으로 잡았다.
   더더욱 다행스러운 일은 서울에 혼자 올라와 있는 작은 딸과 함께 할 시간이 많아져서
   작은 딸이 좋아하는 김치찌게도 만들어 먹이고, 같이 공연도 보러가고 할 수 있어 행복 할 것 같고,
   자주 둘러보지 못했던 경기도 일원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 질 것 같고,
   부산, 대구에 이어 내게 제 3의 고향과 같은, 또 많은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는 서울을
   조금 더 여유있게 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지게 될 것 같다.
   어쩌면 이번 개성공단에서 상주하게 되는 일이 내겐 처음 경험하게 되는 일이며
   또한 육체적으로 고되기 보다는 정신적으로 많이 피곤하고 외로운 일정이 될 것이나,
   이 또한 슬기롭게 받아들이고 활용하여 조금 더 나를 완성시켜 나가는 계기를
   만들어 갈 것이라는 의지를 다져 본다.


   그동안 제 스스로가 저와 약속한 일주일에 3번은 꼭 블로그를 올린다는 의지,
   저는 그것을 늘 지키려고 했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을 지킴으로서 제 생활의 중심을 지키고,
   <땅의 회상>을 변함없이 찾아 주시는 분들께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며, 감사함의 표시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이 없는 개성에서 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머물게 되면서
   이번 9월말까지는 어쩔 수 없이 일주일 한번 정도 밖에 올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분들, 더운 날씨에 건강 유의하시고 늘 행복하십시요.
   감사합니다.



사무실 나의 방에서 바라보는 부산시가지 풍경









집 옥상에서 바라보는 부산 시가지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