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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용호동 추억과 회상 본문

독백과 회상 1999

용호동 추억과 회상

SHADHA 2025. 3. 5. 09:00

 

 

 

1. 

해운대 오션타워 설계하던 해에

내 몫 1억 2천5백만 원 중 

우선 3천만원 빼와서  

어머니와 단 두식구가 된 뒤.

17년 셋방살이 설움과 

결혼 후 8년 셋방살이을 털고 

난생처음 내 이름으로 등기된 나의 집.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큰 딸과

유치원 다니는 작은 딸.

아내에게 커다란 희망과 행복을 안겨주게 된 집.

 

일생 중 가징 행복한 때였다.

저녁 때에 가을바람 싱그러운 거리를 

가족들과 손을 잡고 산책하며

대연동 가구점 많은 거리, 이리저리 돌며

아내가 갖고 싶어하던 장롱이며 식탁,

아이들의 꿈이었던 이층 침대, 책상에 색깔 예쁜 옷장까지.

내가 갖고 싶어하던 최신형 인켈 전축에다 31인치 텔레비전.

밤이면 베란다에서

새로운 집을 장식할 그림을 그리느라 밤을 새우고,

 

 

2. 

아이들이 커 갈수록 

점점 좁아져가는 24평짜리 크지 않은 아파트였지만

동쪽 베란다 쪽으로 시원하게 트인,

광안리 바다와 이기대를 바라다볼 수 있고

아침이면 가장 먼저 햇빛이 드는 그런 정든 집이었는데,

이젠

10년의 인연을 끝내려고 한다.

끝내고 싶어서 끝내는 것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쫓겨나야 하기에

그 인연의 끝이 더욱더 아프다.

 

밤이면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 잠이 드는 용호동 철거민촌 사람들은 

정든 집 쫓겨날 때, 

다시 기거할 수 있는 집을 배정받고 쫓겨났으나 

우리는 갈 곳도 없이 쫓겨난다.

언제, 어디서 

다시

우리 가족들이 우리 집이라 하여 발을 뻗고 잠이 들 수 있는 터를

다시 마련할 수 있다는 기약조차 할 수 없으니,

아프다.

 

아직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한 채,

지난 일요일 저희들 방, 배치를 바꾼다고

책들과 짐을 이리, 저리로 옮기고

신화, 핑클의 사진들을 모양내어 다시 붙여대든,

두 딸에게 너무 미안하다.

한 달 후가 될지,

두 달 후가 될지,

석 달 후가 될지,

 

우리는 정착할 곳도 없이

용호동 집을 떠나야 한다.

 

 

3.

집 없었던 10년 전으로 다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면 되겠지 하나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전에 또 헤져나가야 할 것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가올 것에 대한 추측보다도

훨씬 더 쉽게 잘 풀려 나갈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지금껏 넘은 것보다 

훨씬 더 어렵게 꼬여갈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같이 두고

쉽게 잠들지 못하는데...

 

이 아파트가 지어질 무렵,

아랫동네에서 셋방살이할 때,

어린 딸 손을 잡고 나선 산책길에

.... 아빠가 빨리 돈 벌어서 우리 이 아파트에 이사 와서 살자,라고 약속하고

이 아파트가 다 지어졌을 때,

나는 큰 딸아이와 한 약속을 지켰다.

 

두 딸이 잠들었다.

한 아이는 사회학자가 되어 선생님이 되고 싶어 하고

한 아이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에 댄서가 되고 싶단다.

나는

그들 스스로가 

그들 인생에 대한 길을 다 잡을 때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그들을 보살필 것이라는 약속을 한다.

 

................................... 1999년 9월 30일 새벽 3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