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스위스 루체른의 히어로 본문
여행 중에는 뜻하지 않은 많은 일을 겪게 됩니다.
세월이 꽤나 지났는데도 쉽게 잊히지 않는 추억이 스위스 루체른에서 있었습니다.
잊히지 않는 스위스 가이드 할머니와 싱가포르 여인 친.
여행 후 주위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던 부분과
저 혼자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으려 합니다.
33년 전인 1993년 스위스 여행은 당초 유럽 여행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의 업무적인 경향이 강한 여행과 다르게
한국으로 귀국 전, 갑자기 포함된 스위스에서의 이틀간의 여행.
취리히에서 하루를 보낸, 우리는 숙소인 알렉산드라 호텔의 지배인에게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가장 좋은 코스를 추천받았습니다..
그곳이 바로 취리히 중앙역 앞에서 출발하는 알프스 엥겔베르그와 티틀리스,
그리고 루체른행 관광버스였습니다.
영국인들과 러시아의 미녀, 홍콩 남자들과 싱가포르 아가씨들.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과 함께하는 여행.
취리히를 출발하여 스위스의 아름다운 전원풍경을 보며 루체른을 거쳐
알프스 엥겔베르그 그리고 티틀리스 산정에서의 멋진 점심식사 후,
다시 루체른에서의 마지막 관광이 시작되었습니다.
버스에서 다 흩어져 정해진 약속시간에 버스로 돌아오는,
지금까지는 한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잘 진행되었었습니다.
우리 일행도 다 각자 흩어져 개인적인 산책과 쇼핑을 즐겼습니다.
약속된 시간이 되었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버스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창이 큰 커피숖에서 나와서 버스를 타니 동행한 우리 일행 중 두 사람은
이미 버스를 타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아직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오분쯤이 지나니 모든 관광객들이 다 돌아왔는데,
우리 일행중 한 사람과 러시아 미녀 그 두 사람만이 돌아오지 않아
우린 농담을 주고받았습니다.
... 둘이 눈이 맞아 같이 어디로 간 거 아냐?
앞 좌석에 앉은 영국인 연인들도 그렇다며 낄낄거렸습니다.
다시 10여분이 지나 러시아의 여인이 돌아오자 모두 박수를 치며 반가워했으나,
나는 초조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버스가 떠날 시간이 15분 이상 경과된 시간.
시간과 규칙이 철저한 스위스 가이드 할머니의 밝았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며
초조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안절부절못하는 스위스 가이드 할머니와 나는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뛰어다니며
우리의 일행을 찾았으나 어디에도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버스로 돌아오며 가이드 할머니는 큰일 났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어 쉽니다.
이미 약속시간 30분이 훨씬 넘어 버린 시간.
시간약속이 철저한 외국인들과 다른 스케줄이 잡혀있는 외국인들의 표정이
전부 어두워져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안절부절 못하던 가이드 할머니는 내게 어떡하면 좋으냐고 물었습니다.
우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그로하여 한국이라는 이미지가 나빠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호수 건너 멀리 루체른 중앙역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 You're Bus, Go ZURICH. I'm waiting my friend.
문법이야 어떻든 대단한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가이드 할머니는 금세 반색을 하며 thank you를 연발하면서도
걱정이 되는지 기차역을 가리키며 기차를 타고 오라고 설명을 해줍니다.
버스를 다시 타서 우리 일행 두 사람에게 먼저 취리히 호텔로 돌아가라 이르고
윗도리와 카메라만을 들고 혼자 버스에서 내리려 할 때.
그 여행 중 줄곳 버스 통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던,
그래서 자주 눈이 마주치고 인사와 웃음을 나누던 싱가포르 아가씨 친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 고개를 돌리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 GOOD LUCK!이라 말해줍니다.
아주 서툰 영어실력때문에 영화처럼 멋있는 이별의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그저 씨익 웃으며 호기를 부렸습니다.
... No Problem. Don't worry.
버스입구에서 돌아서서 모든 일행들에게 미안하다며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걱정스러워하는 격려의 눈길을 받으며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버스 앞에서 스위스 가이드 할머니는 내 두 손을 꼭 움켜잡고는
... You're very, very gentle man. 이라며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버스는 취리히로 가는 직선길을 향해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고,
나는 홀로 남겨진 채 우체국 앞 스취와넨 광장에 쓸쓸히 서 있었습니다.
낯선 곳에서의 예상치 못했던 혼자 남음.
약간의 두려움이 밀려오는 순간, 머릿속에 또 다른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 차라리 잘됐다.. 루체른을 좀 더 둘러볼 수도 있고, 기차여행도 즐길 수 있으니.. 오히려.
홀로 남은 광장 중앙에 서서 다시 주위를 둘러볼 때.
낯익은 얼굴이 손에 쇼핑백을 들고뛰어 오고 있었습니다.
... 버스는?
... 먼저 가라 그랬습니다. 우리 때문에 무작정 기다리게 할 수 없었습니다.
... 한 시간도 못 기다려 준답니까?
... 여기는 한국이 아니고 스위스 아닙니까?
그의 얼굴에 검은 절망의 그림자가 내려지고 있었습니다.
... 걱정 마세요. 기차표 끊어놓고 천천히 더 놀다 갑시다.
순간 한참을 가던 버스가 돌아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출발해 놓고도 걱정이 되던 가이드 할머니가 버스 뒷창에서 계속 광장을 지켜보다가
아스라이 그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버스를 돌렸답니다.
길게 늘어진 직선길이였기에...
우리는 그렇게 다시 버스를 탔습니다.
한편으로 안도감이 들면서 또 한편으로는 루체른을 더 둘러볼 수 없는 아쉬움을 남기면서..
버스의 중앙 통로를 걸으며 연신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시하고 자리에 앉으니
환하게 웃어주는 싱가포르 여인 친... good fortune!
버스는 다시 출발을 했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스위스의 전경들이 겨우 느껴질 무렵.
가이드 할머니는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 무사히 여행을 마쳐서 다행입니다.
우리 전부를 위해 혼자 루체른에 남겠다고 한 우정이 깊은
한국의 젊은 신사에게 박수를 보냅시다.
그는 이번 여행의 히어로입니다.
우리 일행은 참 좋은 팀이었습니다.
버스 내의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돌아보며 박수를 쳐 주었으나,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미안함과 함께 무안함이 얼굴로 밀려와 벌겋게 달아오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친의 눈길이 내 머리에 머물러 있음을 느끼어 더욱더 그러했습니다.
우리 일행의 코리안타임 습성으로 하여 히어로로 칭찬받는다는 게
더욱더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취리히 중앙역앞에서 해산을 하며 가이드 할머니와 저는 격렬한 포옹을 나누었습니다.
빨간 자켓입고 스키를 즐기던 그 멋쟁이 스위스 가이드 할머니.
30대의 젊은 날, 짧은 순간이였지만 깊은 추억을 남긴 루체른이었습니다.
부드러운 봄비가 수채화처럼 내리던 취리히의 저녁.
취리히 중앙역 맞은편 반호프 거리가 시작되는 쵸코렛 가게의 화려한 쇼우 윈도 앞에서
빗방울에 번져 수만개의 빛나는 보석 같은 불빛 속으로부터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싱가포르여인 친을 보았습니다.
6개월 뒤 문제를 일으켰던 그와 나는 다시 싱가포르의 웨스트 비치에 앉아
랍스터와 중국식 양념으로 조리된 게요리를 먹고 있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그 이후에도
그와 오세아니아(호주, 뉴질랜드) 여행, 캐나다 여행, 말레이시아 여행까지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2003년 스위스 루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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