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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경복궁 광화문과 흥례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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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광화문과 홍례문
경복궁 가는 길
<오후의 명상>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운이 좋으면 화가를 만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쑥스러움 무릅쓰고 사인을 받고 싶었다.
오월의 햇빛은 찬란했고,
오월의 하늘은 그의 그림만큼 맑았고,
인사동 거리에서 만나는 오월의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나는 운이 좋았다.
..............
몸과 마음이 조금씩 지치려고 하는 오후 3시쯤
고요히 참선 자세로 앉아 그의 그림을 바라보라.
그러면 스르르 눈이 감길 것이다.
감긴 눈앞으로 새 한 마리 날아오고,
꽃 한 송이 피어나고,
멀리서 나룻배 한 척 그대를 태우러 밀려올 것이다.
그러면 주저말고 그 배에 올라타서 강을 건너라.
피안의 기슭에서 그대를 기다리며
한 사람이 서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의 눈을 보라,
눈부처가 보일 것이다.
..............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도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그대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녘별 뜰 때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정호승 <눈부처>--
...............
종로 3가의 밤.
예전에는 낯선 곳에서의 낯선 밤이 아니였는데
지금은 낯선 곳 낯선 밤이였다.
軍 제대후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사흘이 멀다하고 서울로 달려왔고
우리는 명동이며 종로를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돌았다.
삼일빌딩뒤 카페 <반쥴>은 우리의 산책 종착지였다
그리고는 단성사앞 버스 정류장에서
늘 그녀와 헤여졌다.
...나, 오늘 집에 안가고 같이 있으면 안돼?
너무도 사랑했기에 그렇게 쉽게 허물기 싫어서
아껴주고 싶어서, 남고 싶어하는 그녀를
억지로 버스를 타게 하여 집으로 돌려보내고
버스를 타기전 돌아보며 웃어주던 그녀의 웃음으로
왠지 허전해지는 마음을 위안하며 섰던 길..
수없이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 후 서울을 내집 드나들 듯 왔었으나
주로 강남이나 여의도에 머물다 내려가기 일쑤였다
저녁식사 약속이 종로 3가여서
오후의 여유시간에 창덕궁을 돌아보고
저녁식사후 술좌석을 거부하고 홀로 산책길을 나섰다.
늦은 밤
난 피카딜리와 단성사 앞길에 홀로 섰다.
그 낯설게 느껴지고 외로운 밤에 숙소로 돌아와
블로그를 돌다 미---루님 블로그에서 읽은
<피안의 기슭에서 만나는 눈부처>가
인사동을 가고 싶게 만들었다.
그 다음날 아침 8시
나는 낙원상가를 지나 미---루님의 언어속에 맴돌던
인사동의 이른 아침속을 거닐었다.
오월의 햇빛은 찬란했고,
오월의 하늘은 그의 그림만큼 맑았고,
인사동 거리에서 만나는 오월의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나는 운이 좋았다.
그런 인사동의 오월의 아침속을 지나
경복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나는 아무래도 운이 아주 좋은 사람이다.
경복궁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글을 따서 지은
조선의 정궁 경복궁.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인데,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정궁의 모습을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문화재청 경복궁 창건배경중에서...
광화문
흥례문
수문장 교대 의식
근정문
경복궁 광화문과 홍례문
경복궁 가는 길
<오후의 명상>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운이 좋으면 화가를 만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쑥스러움 무릅쓰고 사인을 받고 싶었다.
오월의 햇빛은 찬란했고,
오월의 하늘은 그의 그림만큼 맑았고,
인사동 거리에서 만나는 오월의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나는 운이 좋았다.
..............
몸과 마음이 조금씩 지치려고 하는 오후 3시쯤
고요히 참선 자세로 앉아 그의 그림을 바라보라.
그러면 스르르 눈이 감길 것이다.
감긴 눈앞으로 새 한 마리 날아오고,
꽃 한 송이 피어나고,
멀리서 나룻배 한 척 그대를 태우러 밀려올 것이다.
그러면 주저말고 그 배에 올라타서 강을 건너라.
피안의 기슭에서 그대를 기다리며
한 사람이 서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의 눈을 보라,
눈부처가 보일 것이다.
..............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도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그대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녘별 뜰 때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정호승 <눈부처>--
...............
종로 3가의 밤.
예전에는 낯선 곳에서의 낯선 밤이 아니였는데
지금은 낯선 곳 낯선 밤이였다.
軍 제대후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사흘이 멀다하고 서울로 달려왔고
우리는 명동이며 종로를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돌았다.
삼일빌딩뒤 카페 <반쥴>은 우리의 산책 종착지였다
그리고는 단성사앞 버스 정류장에서
늘 그녀와 헤여졌다.
...나, 오늘 집에 안가고 같이 있으면 안돼?
너무도 사랑했기에 그렇게 쉽게 허물기 싫어서
아껴주고 싶어서, 남고 싶어하는 그녀를
억지로 버스를 타게 하여 집으로 돌려보내고
버스를 타기전 돌아보며 웃어주던 그녀의 웃음으로
왠지 허전해지는 마음을 위안하며 섰던 길..
수없이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 후 서울을 내집 드나들 듯 왔었으나
주로 강남이나 여의도에 머물다 내려가기 일쑤였다
저녁식사 약속이 종로 3가여서
오후의 여유시간에 창덕궁을 돌아보고
저녁식사후 술좌석을 거부하고 홀로 산책길을 나섰다.
늦은 밤
난 피카딜리와 단성사 앞길에 홀로 섰다.
그 낯설게 느껴지고 외로운 밤에 숙소로 돌아와
블로그를 돌다 미---루님 블로그에서 읽은
<피안의 기슭에서 만나는 눈부처>가
인사동을 가고 싶게 만들었다.
그 다음날 아침 8시
나는 낙원상가를 지나 미---루님의 언어속에 맴돌던
인사동의 이른 아침속을 거닐었다.
오월의 햇빛은 찬란했고,
오월의 하늘은 그의 그림만큼 맑았고,
인사동 거리에서 만나는 오월의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나는 운이 좋았다.
그런 인사동의 오월의 아침속을 지나
경복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나는 아무래도 운이 아주 좋은 사람이다.
경복궁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글을 따서 지은
조선의 정궁 경복궁.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인데,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정궁의 모습을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문화재청 경복궁 창건배경중에서...
광화문
흥례문
수문장 교대 의식
근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