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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아스라45 시월은 弦의 달 본문

아스라의 첼로

아스라45 시월은 弦의 달

SHADHA 2004. 2. 8. 18:05


아 스 라



C03



시월은 弦의 달

10/29







샹송 오두막 라팽 아자르.
이 퇴락한 집에서 차대신 술을 마시며
가을의 서정을 잠재우고 싶어집니다.
시월 끝자락을 지나는 새벽의 초침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그곳에서 샹송대신 고한우의 '암연'을 청해 들을 수 있을까요?
포도주 대신 혀끝이 돌돌 말리어 올라 가는 독한 술 죽엽청주를 마실 수 있을까요?
'이마에 소금이 절이는' 박목월 시인의 그림자를 거기서 느껴볼 수 있을까요?
아주 낯선 곳의 도피를 꿈꾸며 그 쓰라림을 낙서처럼 버릴 수 있을까요?

침잠과 몰입...

버스를 타고 서울에 가면서 오후 노오란 벼들이 누워있는 들판을
안일하고 나른한 시선으로 바라다 보고 있었습니다.
까만 염소 두 마리가 빈 들녁의 어스름을를 채우고 찌그러진 양철 지붕 위
덩굴도 말라버린 퇴락한 꼭대기에 가을 볕을 노랗게 익혀가는
늙은 호박 너댓덩이가 덩그라니 얹혀 있었습니다.
낮 동안 그 따스함을 모두어 들였다가 밤이 되면 스스로
그 따스한 온기를 실처럼 풀어내는 보노니아의 돌처럼 따스한 호박.
나는 볏단의 노오란 잎새를 더듬는 한마리 메뚜기처럼
남아있는 양광에 기대어 '몰입의 즐거움'을 읽었습니다.
그 곳에서 마주친 'devil'이란 단어,떼어내다, 동강내다란 뜻을
가진 그리스어 'diabollein'에서 온 말이라구요.
이틀간의 분주한 시간을 까먹고
사그러지는 빛의 몇가지 색채만을 간직한채 솔개마냥 비행기에 올랐을 때
언뜻 펼쳐 본 책에서 마주치는 또 하나의 말.
이반 쿨라코프의 전언이 절묘하게 나의 망막을 훑고 지나갔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어떻게 선을 긋느냐가 아니라
천개의 쓸모없는 선들 중에서 어떻게 하나의 훌륭한 선을 잡아낼 수 있는가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창조의 멜로디와 '선'에의 부단한 탐구가 깊은 산의 울림이 되어
캄캄히 누워있는 감성을 자극하였습니다.
선과 붓질과 색채와 구성의 유희.

김포에서의 안개가 무색하게 흰 구름사탕위를 날으는 비행기는
아침 대기실에서 본 박명복님의 '안개꽃' 그림과 심비디움의 하얀 꽃 무더기를
중첩시키며 실핏줄 끝까지 당기어 왔습니다.
공명하는 가을의 어느 현에선 바이올린을 켜는
소녀의 파열음이 이명처럼 계속 들리어 왔습니다.

'반주는 단순히 뒤에서 따라가는 게 아니라 음악이
색채를 다르게 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인물 사진을 찍을 때 배경이 인물을 다르게 보이는 효과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가 강충모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