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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샘

푸른샘57 아주 사소한 꿈 하나로...

SHADHA 2004. 2. 11.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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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샘




아주 사소한 꿈 하나로...

12/13





 


마음

아침저녁
방을 닦습니다
강바람이 쌓인 구석구석이며
흙 냄새가 솔솔 풍기는 벽도 닦습니다
그러나 매일 가장 열심히 닦는 곳은
꼭 한군데입니다
작은 창틀 사이로 아침 햇살이 떨어지는
그곳에서 나는 움켜쥔 걸레 위에
내 가장 순결한 언어의 숨결들을 쏟아 붓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찾아와 앉을 그 자리
언제나 비어있지만
언제나 꽉 차 있는 빛나는 자리입니다.



***

멀리 사는 그리운 이여!

학기가 끝나고 이제 방학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도서관에 반납할 책을 정리하다가
곽재구님의 '참 맑은 물살'에서 발견한 참 맑은 시 한 편이
그대를 부르고싶게 하여... 이렇게 보냅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 육성을 나누기로 했던 우리 약속이 엇갈리며...
서로가 사는 시간과 공간의 격차를 일깨웁니다.
이곳 남쪽은 뜻밖에도 그제 종일 첫눈을 맞았지요.
불투명한 비취빛 바다 위로 하늘하늘 떨어지는 하얀 눈발은
무척 소담하고 고요했는데, 또한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게 녹더군요.

이렇게 하얀 겨울이면 문득 나는 언젠가 살아본 듯 작은 토굴같은 집을 그리워합니다.
천장은 몹시 낮고 창문은 작아 어둡게 숨은 방은 연탄 두 장으로 하루의 온기를 얻습니다.
바다 쪽에서 불어온 위풍에 코끝이 시리기에 엷은 카시미론 솜이불을 목까지 둘러쓰고,
앉은뱅이 책상에 마주앉아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며 겨울날 하루하루를 지냅니다.
짧은 해가 지면 금방 돌아올 이를 위해 작은 석유 풍로 위에 돼지고기 넣은 김치 찌개를
보글보글 끓입니다. 순두부를 듬뿍 얹고, 시금치 나물과 시원한 동치미도 준비합니다.
드디어 작은 소반에 마주앉으면 이마가 맞닿고, 훌쩍이는 콧물 소리조차 싫지 않습니다.

이 짧은 시나리오, 그 작은 행복의 언저리가 가슴 시리게 그립습니다.
그렇게 단순하고 소박한 겨울이 내게 있었던가 기억조차 아득한데도
요 며칠을 그 작은 방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메어집니다.
가난하고 정갈한 방의 꿈은 이제 겨우 내 마음속에 남아있을 뿐입니다.

노숙자처럼 떠도는 영혼 하나 기다리는 뜨거운 방을 만들기 위해,
나는 이 겨울의 입구에서 세 듭니다.
이삿짐은 보셨지요? 앉은뱅이 책상 하나, 석유 풍로와 냄비.
그리고 몇 권의 책과 이불보따리, 샤갈의 복사화 한 장이 모두이군요.  

그리운 이여...
우리에게는 육성의 전화조차 사치인가 봅니다.
나는 이제 아주 사소한 이 꿈 하나로 이 겨울의 추위를 막아보렵니다.
찬 이마, 훌쩍이는 콧물 소리로 찾아와 줄 추운 그대가 거기 있기에.


'00.12.13
쪽 방에 세든 푸른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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