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샘
바다는 한 잔의 茶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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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한 잔의 茶가 되어...
세 개의 정숙 3.
열 평의 마당 풍로 위에서 물이 아프게 끓는다 찻종에 반쯤 따른다 얼굴에 감기는 김의 뜨겁고 흰 머리카락 짧은 溫氣 속에 몸을 맡기고 창 밖을 내다본다 진눈깨비 친 길이 언덕 위에 눕고 行人이 가고 있다 가고 있다 낯모르는 그와 和解한다, 오래 오래 개인 하늘에 한 마리 새가 한없이 날고 있다.
내가 가진 가장 오래 된 책들 중의 하나는 오늘의 시인 총서에서 뽑은 황동규 교수의 '三南에 내리는 눈'이라는 시집입니다. 발행연도를 보니 1974년 12월 20일이었군요. 이 책은 그 후로 아마 한 다섯 번쯤의 이사 때도 빠지지 않고 나를 따라온 것인데, 겨울이면 더욱 손 가까이 있어서 수시로 읽히며 서리나 살얼음 내린 가슴속이라도 순식간에 뜨거운 간헐천같은 소용돌이를 일으킬 수 있는 활화산의 교본입니다.
'소나기'를 쓴 황순원님의 자제다운 깊은 통찰력과 아직도 넘치는 재기발랄함을 잃지 않은 그의 모습을 최근의 자하헌 산창한담을 엮은 이병한 교수의 漢詩집을 통해 읽으며. 역시 삼십 여 년의 긴 시간을 두고 흠모할만한 분이었음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위의 시는 이후로 아침마다 나홀로 마시는 차 한 잔의 배경이 되어 왔습니다.
<물은 한 잔의 연두빛 차가 되어 내 안에 흘러 들어와, 곧 깊고 푸른 바다가 됩니다. 그 푸른 바다는 짜디짠 암염으로 포화되어버린 그러나 時空의 그물에서도 빠져나갈 수 있는 무형의 존재입니다. 어느 유년의 봄날 뇌리에 선명히 刻印된 소금밭 바다... 그 가슴에는 외로운 섬도 떠있고, 폭풍의 섬도 있으며, 보물섬도 숨어있습니다.
오늘도 나는 실험실에서 습관처럼 두 잔의 물을 파이렉스 폿트에 붓고 가열합니다. 물은 이미 증류되고 이온 교환기를 거친, 다시없이 투명하고 맑은 것입니다. 서서히 沸點을 향해 달아오르던 물 속에서 숨은 기체방울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합니다. 물고기 눈알 같은 작고 투명한 방울들, 魚目입니다. 유리 폿트 가장자리로 무수히 많이, 이윽고 가득히 돋아나며 물은 맹렬히 끓어오릅니다.
한 잔의 차를 창밖 멀리 멈춰있는 고요한 연안의 바다를 바라보며 선 채로 마십니다. 바다는 한 모금씩 내게 스며들어와 가슴의 빈곳을 적시고 채우며 조금씩 일렁입니다. 어떤 쓰라린 추억의 그림자도 지우게 마냥 조용히 지워줍니다. 남은 한잔의 물을 빈 잔에 따릅니다. 엉키며 춤추는 김, 수증기의 실오라기... 항상 남는 또 한 잔의 물이 다 식도록 어쩌면 영 오지 않을 누군가를 무심히 기다립니다.>
오늘 바닷바람은 생각보다 훈훈하군요. 방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앞마당처럼 가까이 다가온 유록색 비단결 같은 바다가 잔물결을 남실거리며 간지럼 타듯 천진하게 노닐고 있습니다. 너르게 날개를 펼친 하얀 갈매기들의 활강이 고요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간밤엔 또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몸부림치는 꿈을 꾸었지요. 어느새 포박하는 운명의 힘이, 질긴 그물의 神이 두려워 떨면서 잠이 깨었답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요?
'00.12.17 초현실 퍼포먼스의 시공 속에서 푸른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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