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샘
한 장 반, 연탄의 명상
12/19
한 장 반, 연탄의 명상
<연탄 한 장>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들선들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 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을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반쯤 깨진 연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을 것이다 나를 끝닿는 데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 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 위에 지금은 인정머리 없는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래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한지 손을 뻗어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은 것이다
저 서해안가에 사는 안도현 시인은 참 가정적인 가장이었나 봅니다. 때맞춰 연탄불을 갈 아주는 그 고역스런 일을 도맡으며 긴긴 겨울밤의 시간들을 홀로 깨어 시를 썼다지요. 그 러기에 연탄에 대한 명상이 이제 오래되어 잊혀진 우리의 기억까지 뚜렷하게 하지요. 갈아 얹은 연탄불의 불구멍 막는 걸 잊고 열어두면, 밤새 절절 끓던 방은 새벽녘엔 서서히 싸늘한 냉기를 찾아갑니다. 밤새 행복했던 꿈이 여명 속에 날아가는 시간이지요.
연탄, 또한 잊은 지 오래된 4B연필의 흑연 색깔같은, 그 묵빛 검음이 일구는 뜨거움과 환함이 문득 고마워지는 날들입니다. 혼자 깨이는 아침, 방바닥의 희미한 온기마저 없었다면 문풍지를 울리는 바람에 마음은 더욱 허탈해지고, 한 번 재채기 소리에 모든 공중누각은 낱낱이 부서져버리겠지요. 저 검은 연탄의 헌신적인 하얀 산화로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대지는 또 다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위해 새 연둣빛으로 물들 것입니다.
** 오, 주여, 어느 사람에게나 그 사람 자기자신의 죽음을 주십시오 죽음, 그것은 그가 사랑을 알고 의미와 위기가 부여되었던 저 생 가운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과일의 껍질과 나뭇잎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나 내부에 품고 있는 위대한 죽음 그 누구나의 모든 중심인 과일 바로 그것이 죽음인 것입니다
- 라이너마리아 릴케
'00.12.19 아직 다 타지 못한 푸른샘 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