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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박경리의 옛날 그 집과 통영 본문

가야의 땅(경남)

박경리의 옛날 그 집과 통영

SHADHA 2008. 5. 24. 14:09

 




박경리의 옛날 그 집과 통영

어느 봄날에 길을 걷는 통영 1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시편 <옛날의 그 집>...


박경리님이 태어나신 고향이며, 돌아와 묻히시길 원하시던 땅,
통영에 다시 와서 섰다.
선생을 기리는 추모제는 끝이 났으나 아직 그 흔적이 남아있는
통영 강구안의 문화마당에 서서 박경리 선생이 남긴 마지막 詩를 읽는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훗날 나도 선생과 같은 심정의 詩를 토해낼 수 있는 노년이 될 수 있기를 간망하고
강구안 해안길을 따라 늘어선 충무김밥집 중에서 통영에 올 때마다 들르게 되는
뚱보할매 김밥집에서 충무김밥을 먹는 것으로 통영에서의 첫 산책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