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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껍데기만 부자인 사람, 안창마을 산책하면서 본문

靑魚回鄕(부산)

껍데기만 부자인 사람, 안창마을 산책하면서

SHADHA 2025. 1. 13. 09:00

 

 


파란 가을 하늘과 하얀 구름
남동쪽으로 향을 잡은 산등성이에
맑고 따스한 햇살이 들었다.
한눈에 먼 경치까지도 다 보인다.
항구와 산과 도시가...
골목골목마다 널려 있는 빨래를 지나온 바람에서
향긋한 비누냄새가 난다.
골목으로 난 작은 창문 안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분명히 이 마을 사람들은 물질적으론 가난하다.
그것을 부인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가난한 것은 아니다.

며칠 전 사무실 건물 지하층에서의 일이다.
차를 주차시키고 지하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홀에 서 있을 때였다.
3대의 엘리베이터가 모두 최상층을 향해 오르고 있어
한참을 서서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음식 배달통을 바닥에 놓고 곁에 서 있던 4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중년 남자가 나를 몇차례 아래위로 훑어 보더니 말을 붙였다.


...이 건물에는 부자들만 있는 모양이죠?
... 왜요?
... 주차장 차들이 전부 고급차들이고 건물도 돌로 되어 있고...
그냥 씨익 웃었다.
... 부자들은 참 좋겠습니다.

...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 그냥 부자면 좋잖아요... 공부를 많이 해야 부자가 되겠지만...
... 부자가 좋기는 좋죠. 하지만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통과 괴로움도 그 많은 만큼
가지고 사는 것 같습니다.
가진 만큼 거짓말도 많이 해야 되고, 바빠야 되고,
가진 만큼 남을 울려야 할 일도 많고
가진 만큼 그 돈들이 나가야 될 곳이 많으니 고민도 많고,...

그의 얼굴에서 알 수없는 웃음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통쾌해 하거나 안도하는 표정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 그래도 부자 한번 되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장님도 부자죠 ?

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 껍데기는 부잔데 속은 가난뱅이입니다.
... 에이 그래도 부자 같으신데요....

그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껍데기만 부자인 사람은 진짜 부자인 사람보다 훨씬 더 괴롭고
가난한 사람보다 훨씬 더 사는 것이 괴롭다.
그렇다고 껍데기만 부자로 보이게 하는 허울들..
건축사에다 사장이라는 직함.
그것마저 포기할 수도 없다.
그것만 포기하면 일반 사람들만큼의 고통만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러지도 못한다.

무허가 건물로 가득한 안창 산마을의 골목들을 돌면서
평온을 느낀다.
숲으로 둘러싸인 양지바른 놀이터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행복하다.
재물의 많고 적음과 행복은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반비례하는 것 같지도 않다.

삶이란 그렇게 알 수 없는 것 같다.
이 가을에...  2003년 가을에

 

 

2003년 법원 앞에서 건축설계회사를 운영할 때였다.

설계비 수금이 늦어지거나 업무 진행이 늦어지거나 설계비를 어음으로 받아서 고민이 많은 시절이었다.

월말이 되어가면 직원들 급료에 4대 보험료 지불, 외주비 지급 등 스트레스에 잠 못 이루던 날이 많았다.

그래도 그때가 사는 것 같고 역동적이어서  좋았던 시절이었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이 글을 다시 읽으니 새롭다.

세월은 또 그렇게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