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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1,000원 짜리 버스 승객 본문

독백과 회상 1999

1,000원 짜리 버스 승객

SHADHA 2025. 2. 20. 09:00

 

 

 

신년 연휴가 끝난 이 항구도시의 겨울은,

바닷바람이 꽤 쌉쌀히 매섭기는 해도 가슴팍으로 드는 햇살은 그래도 따스하다.

승용차가 없어진 이후, 첫 외출로 오랜만에 집을 나섰는데,

낯선 외출.

큰 길까지 낮은 언덕길을 내려가며 줄곳 고민을 했었다.

아침에 아내에게 받은 만 원짜리 한 장으로 담배 한 갑사고  남은 돈은 8,400원

점심은 굶으면 되는데, 늦은 아침이라 더 먹고 나올 걸 하는 후회가 든다.

새벽까지 잠을 들지 못하는 오랜 습관 탓으로 하루에 담배 한 갑으로는 늘 모자랐다.

저녁때 담배 한 갑 더 사야지...

 

버스를 탈 것인지, 택시를 탈 것인지를 버스 정류장이 있는 대로변까지 나와서도

그 고민을 끝내지 못했다.

굶더라도 택시를 타고 싶었지만 택시 요금도 만만치 않은데다 길이라도 막히면

초조한 마음으로 요금 계기판을 들여다 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싫었다,

결론적으로 버스를 타는 것이 기정 사실이나 버스를 안 타 본지 오래되어 약간 두렵기도 했다.

1983년 난생 처음 일본 가는 비행기를 타러 김해공항 가는 날처럼.

 

버스정류장에 다가서자 바로 목적지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고 타는 승객이 아무도 없어서

혼자 무의식적으로, 순간적으로 버스를 탔는데 낭패가 났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모르겠다.

토큰? 버스표? 현금은 얼마나?

뭔가 집어넣는 구명은 있는데, 머릿속이 뿌연 연막 속에 갇힌 느낌로 당황스럽다.

 

어정쩡한 표정으로 눈이 마주친 운전기사에게 저기 얼마를 내야 합니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아래위를 훑어보던 운전기사.

..... 520원인데, 500원만 내소

..... 저기 천 원짜리인데

운전 기사의 표정이 마냥 짜증스럽다.

.... 거기다 집어넣고 다음 정류장에서 500원 받으소

이게 무슨 소리야? 엉겁결에 돈을 집어넣기는 했는데

.... 다음 정류장에서 500원을 받으라니? 무슨?

    아! 현금 내는 승객에게서 500원을 받으라는, 알았어!

어느 정도 상황이 수습되었다는 판단으로 주변을 돌아보니,

버스 안은 종점에서 탄 서너 명의 승객 이외는 텅 빈 상태. 출근 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이다.

그래도 아직은 뭔가가 마무리되지 않은 것이 있기에 동전통옆 기 등을 잡고 그저 서 있었는데,

힐끗 쳐다보던 운전기사가 한마디 더 거든다.

... 자리에 가서 앉아 있으소!

질책받고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재빨리 앉았다.

자리에 앉고 나서도 운전석 백밀러로 탐탁지 않게 힐끔힐끔 쳐다보는 운전기사와 마주치니

빌어먹을 좌불안석이다.

잔돈 500원을 받는 거래가 이루어져야 할 정류장에 도착할 무렵부터

난 줄곳 차 창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낯선 상황.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나의 일상 생활이었으며 나의 가족들과 직원들의 평범한 일상이

지금 내게 새삼 낯선 상황이라고 느끼는 게 부끄럽다.

어쩌다 불가피하게 직접 차를 운전할 수 없을 때마다 직원들이 집으로 태우러 오고 했던 거만한 삶.

그런 삶을 살았던 우매하고 건방진 삶이 부끄러워졌다.

520원! 그 소중한 가치를 알지 못했음이 또한 부끄러웠다.

 

집으로 돌아올 때도 버스를 탄다면 가볍게 점심식사를 하고 담배 한 갑을 더 사고도 돈이 남는다.

갑자기 부자가 된 느낌이 든다.

겨울 햇살이 차창 유리를 지나서 어깨죽지로 가슴으로 쏟아져 든다.

참 따스하다.

난 그 후로도 줄곳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늘 다니던 길이었는데도 경치가 다르게 느껴진다.

많이 다르다.

그 후 열 두 정류장을 지나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꼼작하지 않고 창 밖만 보고 있었다.

버스 안에 승객들로 가득 찼지만 그저 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 버스비 잔돈 500원은 끝내 받지 못했다.

 

 

....1999년에<고백과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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