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파멸한 자의 망년회 본문
기인
슬픈 음모가 끝났다.
파멸 중에서도
그래도 조금은 행복한 파멸을 위한
음모의 각본,
그 초안을 탈고한 자가
푸른 바다를 우상처럼 섬기는 자가
그 성전에,
바다의 성전에 올라 기도한다.
.... 다만 나의 오류를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만 살고 싶습니다.................. 해운대 달맞이 언덕에서
1.
이제 다 끝난 것 같다.
모든 것이 갑자기 지나갔다.
미련과 애착.
쉬이 털리지 않는 몇 가지 욕심들.
나의 이름과 회사,모든 것을 다 걸어서 만든 경력과 사소한 명예.
10년 이상 두 딸들이 성장하며 살던 집.
분신처럼 같이 뛰어온 승용차까지 다 포기하고 나니
남은 것은 내 몸 하나와 아내와 나의 딸들 뿐,
무엇 하나라도 살려내려고 몸부림칠 땐
지독한 번민과 고통이 양 어깨에 수천만 톤 짐이 되어 내려앉아서
숨마저 쉴 수 없었는데
다 털어내고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포기해 버리니
깊은 한숨 속에서도 마음은 고요해지고
어깨도 한결 가벼워짐을 느끼던,
그런 겨울 아침,
해운대 바닷가에서 달맞이 언덕 해월정까지 걸어 올라가서
동해 바다 앞에 선다.
살던 도시로부터
같이 살던 사람들로부터 받는 연민과 동정의 눈길을 피해.
스스로 느끼는 지독한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쳐온 사람이
푸른 산소호흡기를 코에다 댄다.
1998년 12월 31일 오전 10시
이른 봄날처럼 따스한 겨울 햇살.
청명한 하늘빛, 아름답게 푸른 바다.
향긋함이 마른 입술을 적시주는 커피 한 잔에 차갑지만 싱그런 바람.
2.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
밝고 기분 좋은 목소리로 아직 날 잊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신년인사를 나누고
웃어본다.
웃고, 웃고 또 웃어도
푸른 바다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두 눈에
축축한 눈물이 배여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달맞이 고개에서 뭐 하세요?
..... 하늘에서 지금 긴급회의 중인데 여기서는 높아서 잘 들려.
..... 무슨 회의?
..... 나를 살리자는 회의.
하느님이 부처님, 예수님, 무함마드, 공자님까지 다 소집해서 이 인간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하고 회의 중이래.
..... 참내, 공자님에 같이 참석해 있으면 많이 불리하겠다.
..... 왜?
...... 비윤리적이잖아요
..... 공자님도 남자야 이해해 주실 것은 이해해 줄 거야.
...... 아이고, 여자 신은 없나? 그래 지금까지는 뭐라 그래요?
...... 살려주자는 쪽이고, 어떤 방법으로 살릴 것인가를 의논 중인데 한꺼번에 살리면
모양새가 좋지 않고 천천히 살리자니 제 명에 못 살 것 같다며 고민 중이야.
...... 빨리 살려달라고 힘 좀 쓰면 안 되나요?
...... 인마, 나 지금 빈털터린데 어떻게 힘을 써!
...... 그럼 고생 좀 하셔야겠네, 이 세상에 돈 없고 백 없으면 끝이지 뭐.
....... 휴우...
3.
파멸을 눈앞에 둔 사람이라도
망년회의 축제 분위기는 나누어 주어야 한다.
아무도 같이 하지 않는 혼자만의 망년회라 하더래도
최소한의 평화로움과 미소 지을 수 있어야 한다.
올가미를 눈앞에 둔 사형수에게도 마지막 만찬은 준다.
그래도 혼자는 너무 외롭다.
.... 영감님 지금 뭐 합니까?
.... 응, 어디야! 커피나 한 잔 할까?
.... 해운대 바다. 나 오늘 파라다이스호텔 회원 마지막 날인데 점심식사하며 망년회 합시다.
..... 무엇으로 할까? 찰리스?
..... 여러가지 푸짐한 뷔페로 합시다.
언제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이런 호사스러운 식사를 다시 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가 없다.
1년 후가 될지? 10년 후가 될지, 아니면 평생 이런 근처에는 얼씬도 못할지 모른다.
오래전에 한번 망해봤던 사람과 이제 막 망하기 시작한 사람이
햇빛이 밝게 드는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 뷔페식당 창 가에 앉아서
윤슬로 하얗게 부수어지는 눈부신 바다를 배경으로
잘 가꾸어진 초록색 잔디 정원과 조형물을 내다보며 먹을 수 있는 한계까지 식사를 했다.
그래도 얼굴은 웃고 있어도 어쩔 수 없이 쓸쓸한 1998년 망년회였다.
..... 회원님, 오늘 회원 카드 마지막 날이신데 카드 지금 다시 만들어 드릴까요?
..... 다음에 할게요....
# 다음에.....
26년의 세월이 흐른 2025년 지금도 파라다이스 호텔 회원 카드를 만들지 못했다.
파라다이스 호텔 뷔페의 식사는 1998년 이후 20년의 세월이 흐른 2018년 2월에 서울에 살고 있는 작은 딸이
식사 자리를 만들어서 아내와 함께 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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