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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의 운명

오정순 90 가을에는 배반감을 느낍니다

SHADHA 2004. 1. 30. 13:45


오 정 순




가을에는 배반감을 느낍니다.

09/22






가을이면 배반감을 느낍니다.

나무들의 세계에 가을이 오면 서로 배신감을 느낍니다.
초록은 동색이려니 하고 비슷비슷한 줄 알고 마음트고 살던 나무들이 가을이 오면 하나둘 등을 돌리고 싶어집니다.
꽃은 보일까말까 하게 피는 모과는 엄청나게 큰 열매를 달고 우아하게 뽐내던 목련을 놀라게 합니다.

지질지질하게 생긴 잎파리를 달고 안으로 안으로 익으며 속을 보여주지 않던 석류가 보석같은 열매의 속을 드러냅니다. 사람들의 환호가 눈부시게 터집니다.

남들보다 조금 잎이 낯설게 생기기는 하였지만 벌레가 끼지 않아 이웃하기 좋은 은행나무는 무슨 구린내를 그렇게 지독하게 풍기며 서 있는지...알 수 없지만 배신이라도 하듯 노랗게 황금빛으로 물들 때면 장관입니다. 미워할 수도 없고 가까이 하기에도 힘든 은행나무는 제 삶의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라고만 말합니다.

그저 아기 손바닥같다고 아기자기하게만 여겨주던 단풍잎이 어디서 그렇게 붉은 색 기운을 뻗쳐내는지 역광으로 비쳐보면 싱싱한 간덩이같습니다.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며 환호합니다.

봄에 멋드러지게 꽃을 피웠던 나무들은 환호를 받는 기쁨을 압니다. 그래서 더 심란스러워집니다. 이미받은 상은 잊어버리고 우리도 가을에 멋지게 만들어주었으면 얼마나 좋아 하면서 투덜거리는 소리도 들립니다.

변하다니요.
늘 같은 하늘아래서 같은 물 먹고 자랐는데 저들이 어떻게 서로 다르게 변합니까. 이해할 수 없어집니다.
가을의 변화를 이해 못하는 나무들은 날마다 심란스럽습니다.

늘 푸르기만 하던 소나무는 그러려니 하는지 속을 모르겠습니다.
이왕 변하려면 산뜻하게 변하게 해주시던지...하면서 참나무과는 자기 색에 불만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도토리나 상수리를 가지고 가서 맛나게 묵을 해먹는다고 열매를 많이 달면 좋아하는 덕에 약간의 위로를 받습니다.

기껏해야 남의 기둥을 타고 오르던 담쟁이 덩굴은 얼마나 예쁘게 물이 드는지 열매가 없어도 만점입니다.
밤나무는 저것 좀 보세요.
봄에 징그럽게 진하게 향을 뿜던 꽃하며 모양새는 얼마나 이상야릇했던가요. 아 그런데 이번에는 가시네요. 만지지 말라 이거지요.

도꼬마리는 나무도 아닌 풀 주제에 꽃에서부터 싸아한 냄새를 뿜더니 열매에는 가시투성입니다. 다 익어 벌어질 때는 장관이랍니다. 꽂꽂이 하는 분들이 즐겨하지요.

하나둘이라야지요.
저마다의 변화는 당연한 생명현상일뿐 저들이 모양이 변했다고 생명체의 의미가 변한 것은 없습니다.
모두 받은 꼴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다만 좀더 열심히 살아서 열매가 실한지 아닌지의 정도 차이일 뿐 그 나무이면 그열매 맺히게 되어있지 않던가요.

묵묵히 살면 그 뿐입니다.
개성이 다른 것과 특별한 것과는 다릅니다.

어디 나무세계 뿐이겠습니까.
가을의 세월을 사는 어른들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열매를 보아야 하기도 하고, 꿈만큼 기대했다가 실망을 하기도 합니다.
오래도록 생각이 닮은 친구인줄 알다가 가을쯤에 보니 턱도 없이 다른 사람을 마주 하는 수가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배반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 열매가 맺히려니 하던 사람에게서 엉뚱한 열매를 보게 되기도 하고 그토록 큰 잎과 꽃처럼 함 때 빛나던 사람이 조촐하게 가을을 맞기도 하며 스스로 힘겨워 하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살았을 뿐입니다.
아무도 남을 보고 뭐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하여도 되는 것을 미루고 있는 것만 챙겨도 좋은 시간일 것같습니다. 가을은 때되면 오는 계절이니까요. 다만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하면 저런 가을을 맞이하더라는 것을 꿰둘을 수는 있겠지요. 그리고 자신을 수용해주는 아량을 기르겠지요.

처음부터 다른 양태를 품었었구나.
그것을 이제야 보는구나 해야 할 것같습니다.

그렇지요?
단단해지고 거칠어지고 오므리는 계절,
가을에는 조금씩 멀리 서십시요.
생존하기 위해 조금씩 강해집니다.
종족 보존을 위해 독을 뿜기도 불사합니다.
한 해를 정리하느라고 모두가 속내를 감출 수가 없습니다.
가을을 잘 보내야 겨울을 잘 맞을 수 있으니까요.

그것이 순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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