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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오정순 94 밥 먹고 가거라 본문

줄의 운명

오정순 94 밥 먹고 가거라

SHADHA 2004. 1. 30. 13:50


오 정 순




밥 먹고 가거라

12/02







밥 먹고 가거라

춥다.
두꺼운 옷을 입어도 춥다.
아마도 옷을 입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항상 춥다. 김장해두었다고 가져가라는 어머니의 분부를 지키기 위해 간다.
가방에는 배추값의 1000배가 되는 현금을 준비하였다.

나는 결혼하여 김장을 포기했다.
어머니가 나보다 잘 하시는 것을 인정해드리고 언제나 맛에 감탄하며 어머니에게 드나들었다. 간장 된장 고추장 그리고 김치를 담그지 않았다. 대입시 수능시험이나 어렵지 한두번 실수하고 잘 모르면 배워가며 마음잡아 하면 어려울 것도 없지만, 그것이 자존심 강한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길이라는 것을 눈치채버렸다.
남들이 보기에는 김장 한번 안하는 멋진 팔자 같지만 김치 두 포기를 위해 나는 고춧가루 20근을 먼저 챙겨드려야 하고 지금은 두 포기의 김치를 가지러 간다.
전에는 함께 김치를 담아 남동생들에게 담아내고 교편생활하는 동생네 것 담아내고 내 것을 담았는데 내 것을 아무리 주지 말라고 해도 그것을 주어야 어머니가 할 일을 다 한 것 같은지 기어히 약속을 깨고 말았다.
그리고 아프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 나이도 추운데 어머니는?....’ 라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급해진다.
착한 것은 추호도 아니다. 이기적일 뿐이다.
그리 멀지 않은 날, 어머니 영정 앞에서 울지 않으려고 후회할 일을 되도록 줄이는 편이다.
노인 집에는 어린이 소리가 나야 어울리는데 두 노인이 있는 자리에는 괴괴함이 깃들여있다. 83세의 아버지는 멀리 움직이고 싶지 않다고 하신다. 겉으로는 아픈 데 없이 말쑥해 보이는데 기운이 없으신가보다.
어머니는 그 아버지에게조차 아직 못다 채운 사랑을 받아내야 하는듯 서러움에 젖어있다가 부엌으로 가신다. 겁이 더럭 난다.
“3시에 밥을 먹고 저녘을 굶어라. 김치 맛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생김치를 걸쳐 밥을 먹고 거북해진 배를 만지며 일어섰다.
냉냉한 두 분 사이에서 한참 너스레를 떨다가 안정의 분위기가 돌자 일어섰다.
어머니는 밥을 먹었으니 다시 밥먹고 가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성화다.
“밥 먹고 가거라.”
언젠가 내가 남에게 무의식적으로 “밥먹고 가”. 하면서 그분들의 심정을 헤아린 적이 있다.
누군가를 위해 밥상을 차리는 동안이 참 따뜻한 시간이라는 것을 그 때 느껴보았다.
생명에 가장 철저히 기여하는 작업, 더불어 함께 먹는 밥상, 그 밥상을 차리는 일이 우리 일상에서 그리 큰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게 우리는 부자가 된 나라에서 살고 있는데 왜 마음은 이리 춥지?
나도 이 다음에 내 딸이 다녀갈 때 확실히 장담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밥먹고 가거라” 라는 말을 확실히 할 것같다.
“벌써 갈라고? 밥먹고 가거라.”

오 알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