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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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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라의 첼로

아스라37 여행 스케치 答信

SHADHA 2004. 2. 8. 17:51


아 스 라



C03



Re;< 여행 스케치 > 答信

10/06  






푸른샘님

님이 주신 달의 그 은은한 염원을 가슴에 품고 그 香을 미처

삭이지 못해 잠을 설친 나날이었습니다.

지난 번 하동 길에 구입했던 녹차를 꺼내와

미진했던 지난 날의 발자취를 더듬어

그 맛을 간곡히 음미하고 있습니다.

오랫만에 온 가족이 다 모인 명절,

외항선을 타시는 아주버님은 늘 자리에 안 계셨던 터라

명절이 그렇게 적막하였는지 모릅니다.

퇴직을 한달여 앞둔 아주버님과 같이 조니워카

큰 병을 열어 모두 한잔씩 흠향하듯 마셨습니다.

그렇게 한구석 마취되어도 좋을 여린 신경들을

갖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알콜의 높은 휘발성분은 그런 삶의 찌꺼기들을

구름처럼 흩어지게 하는 묘한 발상을 가진 것 같습니다.

돌아오는 길 넉넉한 연휴를 아껴 밀양 본가

근처에 있는 표충사와 얼음골 사과나무를 보고 싶었지만

시험을 앞둔 아들의 간곡한 눈빛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냥 되짚어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노오란 들녁의 풍요가 닫혀진

가슴의 비좁은 통로를 열어 주었습니다.

또한 창조의 불길을 당기던 그 환타지의 손으로

그 들녁을 익히던 바람이 딱딱한 나의 이마를 짚어 주었습니다.

골짜기의 타들어 가는 격랑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슴 속에 놓여진 몇개의 浮石을 흔드는

코스모스의 부침은 또 얼마나 좋던지요?  

맨발로 황토 길을 밟아온 해질녁의 그 어스름은

또 얼마나 나를 미치게 하던지요?

산봉우리의 능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해질녁의 노을은

하얗게 피는 11월의 녹차꽃만큼이나 나를 전율케 합니다.  

푸른샘님

가슴을 기울여 이 빗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섬세하기 그지없는 완벽한 님의 선율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조곡만큼이나 가슴을 에이는 것 같습니다.

바람으로 풍경을 켜는 고독한 님의 연주에

허술한 빈 가슴팍을 조율해 봅니다.

어느 玄이 그토록 여리고 강한 音을 살려낼 수 있겠습니까?

한권의 冊에서 느껴지는 그 여운이 또 다른 책을

손에 들게 하는 것처럼 여행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듯 끊임없는 독서의 습관은

콩나물에 물을 주는 행위와 같아서

그 사유의 샘이 마르지 안게 돕는 것은 아닐런지요?

여행 길에 마주치게 되는

작고 따스한 들꽃의 모든 편린을 모아서

내 삶의 한 귀퉁이를 다시 쌓고 텃밭을 일구듯 딱딱해진 흙을

갈아 엎으며 민들레처럼 원하는 씨앗들을 파종할 수도 있는 땅.

숨막혀 놓아버리고 싶던 그 어질한 행간에 보리밭에

부는 푸른 바람을 흐르게 하고 산 꿩의 울음 소리도 풀어 놓고

가는 게 여행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천일홍인가요,간간히 차창으로 와락 달겨들어

이내 멀어지던 그 작고 붉은 망울.

언뜻언뜻 가슴을 문지르고 가는 하얀 메밀꽃의 정경은

죽어도 아니 잊힐 것 같습니다.

3년전 공항 대합실에서인가 탑승 시간을 기다리면서 마주쳤던

그림 (박아무개님, 이름을 잊었어요.)의 '과수원의 향기'처럼요.

아주 자잘한 배꽃의 원경을 푸른 안개가 아슴하게 감싸고 있는

그림이었는데 그 때 그 그림을 사지 못한 것을 늘 후회하고 있습니다.

집안의 흰 벽면에 그 그림이 걸려 있는 상상을 하면서

언젠가 꼭 그 그림을 만나고 싶어집니다.

그런 후회의 잔향 때문인지 자잘한 흰 알갱이의 꽃을 모아 주는

메밀꽃을 볼 때마다 나는 달빛인양 그것들을 쓰다듬게 됩니다.

빛과 그늘,이슬과 바람을 고루 섞어 익어가는 한그루의 사과나무는

너무도 향기롭습니다.
시야에서 사라질 깊은 단풍의 절정을 한껏 끌어 안으며

11월엔 꼭 보성의 녹차밭에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때 핀다는 하얀 녹차꽃을 보고 싶습니다.

작년 종일을 해를 안고 목포를 향해 가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 날은 완전 강행군이었습니다.

땅끝마을 가는 길에 빨간 황토밭과 계약 재배를 한다는

맥주 보리가 인상적 이었습니다.

맨발로 걸어보고픈 충동을 느꼈습니다.

가는 길에 허준 유배지와 윤선도의 유배지가 스쳐 지나 갔습니다.

염전도 보였구요.

그리고 대흥사 가는 길

진입로가 그렇게 길다니 다리가 너무 아팠습니다.

서산 대사와 초의 선사의 흔적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초의 선사의 기념관엔 그의 다도에 대한 싯귀들이

나를 조용한 흥분 속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산채 비빔밥도 맛이 있었습니다.

목포 친지들과 소주 몇 잔 기울이고 집을 향했습니다.

오는 길에 강진 영랑 생가에 들렀지요.

아직 피지 않은 모란 꽃이 가득 심어져 있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초당에도 들러 그곳에서 그가 집필했다는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를 떠올렸습니다.

돌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산 속에 있었는 데 솔바람 사이로

흐르는 땀을 씻으며 님의 향기를 맘껏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근처에 있는 백련사에선 동백 축제가 있었는지 사람들

인파가 북적거리고.. 나는 노란 수선화가 피어 있는 자리에서

사진 한장을 남편에게 부탁했습니다.

연못에 비친 자신의 초상에 너무 놀라 그만 그 연못에

빠져 죽었다는

나르시소스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아름다운 낙조.

멀리 보이는 영암 월출사의 산 봉우리들.

차창으로 케메라를 들이대며 천관산의 묘한 봉우리와

사자산의 기품어린 능선을 담아보려 애를 썼습니다.

푸른샘님

다음에 다시 가게 되면 득량만에서 잡히는 전어 회와

미황사와 <관서별곡 카페>에 꼭 들르겠습니다.

帝岩山과 天冠山의

먼 스카이라인도 다시 눈여겨 보고 싶습니다.  

언젠가 '하바비여'의 마스크님 칼럼에서 읽은 詩를

다시 읽으며 잠을 청합니다.


비비새가 혼자서 앉아 있었다

산에서도 마을에서도

멀리 떨어진

논벌로 지나간

전봇줄 위에  동그마니 혼자서

앉아 있었다

한참을 걸어오다

뒤돌아 봐도

그 때까지 혼자서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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