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샘
<내 초라한 그림자에 이별을 고하고... >
09/03
<내 초라한 그림자에 이별을 고하고... >
8월에 부는 태풍이 다행스럽게 우리나라를 빼두고 일본열도를 차례로 쓸고 지나간다. 삿포로에 있을 때는 오사카에 불던 바람이 새벽엔 그저 서늘하더니 나중엔 비를 섞어서 지금 동경을 후려치고 있다. 동경역에서 내려 皇宮外苑(고쿄가이엔)을 찾아가는데 은근히 겁이 난다. 그래도 가까이 가보니 우중임에도 외국인들이 많다. 아직 유모차에 실린 아이를 데리고 꿋꿋이 여행하는 사람들은 보고 감탄했다. 애기 비옷을 입혔다 벗겼다를 반복하는데 차라리 내가 업어주고 싶었다. 이행교를 건너고도 천왕이 살고 있는 東御苑은 또 물 건너 다리 건너에 있다. 그는 경호원과 말을 부치더니 천황이 아직 자고있으니 조용히 하라한다고 농을 한다. 저곳에서 한국을 침략할 계획과 합방의 밀약이 다 이루어졌다 생각하니 참 쓸쓸하였다.
外苑까지 걷는 길은 골프장처럼 고운 잔디가 촘촘히 깔려있고 세상의 아름다운 소나무는 다 옮겨다 심어놓았는지 미인대회 나온 다리처럼 날씬한 몸매를 뽐내고 있다. 갑자기 강풍이 불어서 알미늄 사다리를 놓고 사진을 찍어주던 전속 사진사가 땅에 떨어졌다. 그는 자기 몸보다 먼저 카메라를 추스른다. 일본 여자와 함께 워싱턴에서 온 청년은 일어를 능숙히 한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데 날아갈 듯한 바람이 불자 남자는 여자를 꼭 안아줄 수밖에 없다. (잠깐 영화 언페이스풀의 남자를 생각나게 했다.) 그대로 바람이 부는대로 쓸리면서 매화교까지 걸었다. 택사스에서 온 부부와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데 부인이 너무 상냥하고 예뻤다. 머나먼 이곳 일본에 와서 뭘 느꼈을까, 단지 오리엔탈리즘을 확인한 건 아닐까? 한국은 가보았을까?
아까 넘어진 사진사가 운영하는 매점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근대미술관이 어디냐고 묻는다. 그는 좀 많이 걸어야한다며 길을 알려준다. 비가 몰아쳐서 옷과 발이 흠씬 젖으니 포기하고 (사실은 일본의 미술에 대한 선입견이 별로여서...) 역쪽으로 걷는다. 이 빗속에도 택배회사 직원들은 씩씩하게 일을 나간다. 그들이 일러준 빠른 지하도 통로로 지나서 쉽게 동경역에 닿았다. 차를 타고 몸을 쉬인 것도 잠시 지도를 꼼꼼히 살피던 그는 우에노역 하나 못 미쳐서 내리면 동경 국립 박물관이 있다고 보고 가잔다. 작은 시골역을 방불케 하는 鶯谷(우구이스다니)역인데 덕수궁 돌담길 같은 길을 돌아서 5분 거리에 아름다운 우에노 공원과 국립박물관과 과학관을 가지고 있다.
날려버릴 듯 세찬 비가 갈 之자로 후려치니 가지고 간 우산은 처참하게 뒤집히기를 반복한다. 아무런 생각없이 앞에 일본 여자와 함께 가는 털 많은 외국인의 뒤를 따른다. 그들도 틀림없이 국립 박물관 행일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 시대의 작품을 가져온 특별전은 14000원이고 일반전은 4200원이다. 표를 끊을 때 여행객들에겐 억울한 실수가 없도록 물어본다. 그 많은 방의 일반전을 보기에도 시간이나 체력이 벅차다. 그러나 들어가 보길 잘 했단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부박한 문화의 뿌리가 그런대로 잘 정리되어 있는 모습을 보며 속 깊은 향기와 맛이 있는 우리 것이 몹시 그리워졌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흔적을 지우며, 자기들의 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돌아서 나오는데 '과학 박물관'도 보고 가잔다. 옷이 흠씬 젖어서 불편한데 그의 호기심 덕에 또 들어갔다. 과학 숙제를 하는 어린이들이 메모도 하고 카메라폰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는 전시실은 화석과 지층 모형 그리고 인류의 진화의 역사, 골격의 모형들로 채워져 있다. 여러 가지 고생대와 중생대의 생물까지 비교하며 전시되어 있다. 물론 자기들이 발굴한 것이 아니라 외국에서 사온 모형들이다. 지구의 자전을 증명하는 진자 운동 추 앞에서 잠시 쉬었다. 손자가 있다면 꼭 한 번 데리고 오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층에선 지진 피해에 대한 사진전, 그리고 관동 대지진50주년 행사로 피해자를 위한 성금모금과 지진 체험이 있었다. 그들에게 가장 가슴아픈 것, 두려운 것이 역시 지진인 것 같다.
돌담길을 돌아 나오는데 오래된 찻집인지 여염집인지 분재와 낮은 동산으로 꾸민 정원이 아름다운 집들이 몇 채 있다. 밖에 걸린 게시판에 쓰인 것이 메뉴냐고 물었더니 아마도 家訓 같은 것이라 한다. 선현들이 남긴 말 중에서 자기 집이 지키는 바를 적어서 내걸어 논 모양이다. 자신있게 내걸 수 있는 그들의 결단이 부럽기도 했다. 아까 그 작은 앵곡역 바로 앞의 조그만 우동 가게에 들어갔다. 소바 전문이라기에 따뜻한 것은 안 되는 줄 알았더니 해준단다. 며칠 전에 먹어본 사게 우동을 시켰다. 물에 젖은 얼굴과 손가락이 오찻잔에 녹는다. 곁 테이블의 잘 생긴 외국인... 식사를 마친 후 그가 드디어 말을 건다. 그는 항상 상대의 호적 조사로 대화를 시작한다. (말려도 듣지 않는다.)
톰 크루즈보다 더 잘 생긴 그 영국인은 지난 수요일에 런던에서 동경으로 출장을 왔다. 컴퓨터의 소프트웨어를 다루는 기술자인 것 같다. 차디찬 모리소바를 맥주 두 병과 함께 먹고 있었다. 주인은 겨우 따순 오차 한 잔을 써비스로 갖다 준다. 이 집에선 오차도 2500원이다. 한 택시 운전수가 가볍게 점심을 먹고 나가면서 35000원을 계산할 정도로 비싼 집이다. 우리에게도 밥알 없는 숭늉 한 폿트를 거저 준다.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숭늉도 다 마시더니 짜디짠 우동 국물을 습관적으로 마시고 있다. 나야 깊숙한 눈매와 푸른 셔츠 깃에 사인 준수한 목을 가진 톰 쿠르즈를 바라보는 것이 잠시의 행복이지만 소금기를 많이 먹고 남편의 혈압이 오르는 것은 걱정이다. 아무튼 어떤 여인의 마음이라도 흔들만한 그의 지성적 이미지가 여행길에 주은 작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그는 내가 길을 잃을까봐 손을 꽉 잡고 다닌다. 잠시 한 눈을 팔 자유도 혼자 물건을 사는 재미도 없다. 돈도 무서워서 잘 쓸 수가 없다. 쓸데없이 낭비하지 말고 (일본)냄새나는 물건은 도무지 못 사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이 마지막 밤인데 아직 마음대로 혼자 쇼핑도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못한 불만으로 볼이 부어 올랐다. 그는 다음 날 쓸 차비 외의 나머지 돈을 다 털어서 쥐어주며 나갔다 오라고 여가를 준다. 내게도 여행 경비의 일부가 있긴 하다. 그는 항상 푼돈으로 쓰지 말고 몫진 것을 사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저것 사소한 소품을 사는 재미가 더 쏠쏠하다. 혼자 쇼핑가면 짧은 일어를 쓰지 말고 되도록 영어로 말하라고 시킨다. 그래야 무시하지 않는다나?
아무튼 처음 얻은 자유이니 신나라 나갔지만 이때껏 눈치와 귀로만 다녔으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벙어리처럼 손가락으로 물건을 샀다. 바디 숍에서 젤이나 샤워 코롱, 그리고 아로마 제품들을 사고 투명한 유리제품의 장식품들을 샀다. 슬그머니 뒤따라 나온 그는 바깥 층계에 앉아서 기다리더니 혀를 차고 웃는다. 이제 시원하냐? 이 썬샤인 시티의 Import market 건물의 옥상에는 해양수족관이 야간에도 열린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젊은 엄마들로 시끌벅적하다. 물고기 보고싶어? 들어갈래? 참 나... 내가 초딩이냐? 하는 짓은 다 애기더라. 콜라 한잔에 시원한 옥상 밤바람을 맞으며 쉬다 들어왔다.
*****
결별
-김지하
잘 있거라 잘 있거라 은빛 반짝이는 낮은 구릉을 따라 움직이는 숲 그늘 춤추는 꽃들을 따라 멀어져 가는 도시여 피투성이 내 청춘을 묻고 온 도시 잘 있거라
낮게 기운 판잣집 무너져 앉은 울타리마다 바람은 끝없이 펄럭거린다 황토에 찢긴 햇살들이 소리지른다 그 무엇으로도 부실 수 없는 침묵이 가득 찬 저 외침들을 짓누르고 가슴엔 나직이 타는 통곡
달아 빠진 작업복 속에 구겨진 육신 속에 나직이 타는 이 오래고 오랜 통곡 끌 수 없는 통곡 잊음도 죽음도 끌 수 없는 이 설움의 새파란 불길 하루도 술 없이는 잠들 수 없었고 하루도 싸움 없이는 살수 없었다
삶은 수치였다 모멸이었다 죽을 수도 없었다 남김없이 불사르고 떠나갈 대륙마저 없었다 외치고 외치고 짓밟히고 짓밟히고 마지막 남은 한 줌의 청춘의 자랑마저 갈래갈래 찢기고 아편을 찔리운 채 무거운 낙인아래 이윽고 잠들었다 눈빛마저 애잔한 양떼로 바뀌었다
고개를 숙여 내 초라한 그림자에 이별을 고하고 눈을 들어 이제는 차라리 낯선 곳 마을과 숲과 시뻘건 대지를 눈물로 입맞춘다 온 몸을 내던져 싸워야할 대지의 내일의 저 벌거벗은 고통들을 끌어안는다
미친 반역의 가슴 가득 가득히 안겨오는 고향이여 짙은, 짙은 흙 냄새여, 가슴 가득히 사랑하는 사람들, 아아 가장 척박한 땅에 가장 의연히 버티어선 사람들 이제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금 피투성이 쓰라린 긴 세월을 굳게굳게 껴안으리라
잘 있거라 키 큰 미루나무 달리는 외줄기 눈부신 황톳길 따라 움직이는 숲 그늘 따라 멀어져 가는 도시여 잘 있거라 잘 있거라.
2003.8.9
푸른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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