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샘
Boys, be ambitious!
09/01
밤새 가볍게 비가 내렸나보다. 새벽에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듯한 얇고 또렷한 빗소리에 잠이 깨었다. 그래, 누군가는 그 낭랑한 소리가 그리워서 지붕을 양철로 바꾸었다지? 아침, 정갈하게 비질된 거리에 나서니 언제부터 저렇게 피어있었나 코스모스가 한들거린다. 하늘은 젖은 듯 우윳빛이고 공기는 청량하다. 12시 비행기를 타기 전에 를 외쳤다는 William S. Clack 박사의 흉상을 찾아 훗가이도 대학으로 향했다. 나는 지나가는 말로 잠시 그런 곳이 있다던데... 하면 그는 무슨 지상 명령이나 된 듯이 가는 길을 알아보고 찾아 나선다. 아침 식사도 북해도 특산의 우유와 야구르트, 연어 회와 찐 감자 등을 골라 먹었는데 바로 그런 농산물과 유가공품이 클라크 박사의 계몽에 의한 소산이란다.
알고 보니 그는 MIT를 나온 후 홋가이도 농학교의 초대 학장으로 초청되어 눈과 야생화의 섬이던 불모지 북해도에 축산과 가공업 그리고 농산물 등의 품종개량으로 이곳 삶의 질을 올려준 미국인이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언더우드나 알렌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 기독교나 의학보다는 농학의 발전을 기한 것이다. 가는 길에 만난 다리가 불편한 청년은 마침 크라크 기념 강당의 지하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이어서 쉽게 길을 안내해주었다. 그는 우리가 지름길로 찾아가도록 알려주고도 한참을 잘 찾아가나 기다리며 서있었다. 덕분에 아름드리 느릅나무 숲과 포플라의 길, 라일락 숲 등을 촬영하고 빨간 나무열매가 꽃처럼 매달린 도서관 앞길을 산책할 수 있었다.
마침 도서관 쪽으로 출근하는 할머니 司書의 차는 빨간색, 귀에는 보청기가 아니라 음악을 듣는 이어폰, 그리고 그녀는 음악에 맞춰선지 흥얼거리기도 하고 흔들거리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왜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출근하면서도 그녀처럼 유쾌하지 못했나를 반성하게 한다. 소녀처럼 빨간 원피스를 입은 백발의 할머니, 나는 잠시 스스로를 향하여 타일러보았다. 이곳까지 찾아와서 야망은커녕 작은 희망도 품지 못하고 야망이라면 그저 내 아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으로 인식하는 나의 소견 좁음을 반성하며, 최소한 작은 소망이라도 가져봐야지 하고 다짐한다. <할머니들이여, 소망을 가져라!>
드넓은 풀밭과 그 위를 거니는 하얀 양과 젖소들, 옥수수와 감자, 탐스런 메론과 사과, 갖가지 치즈와 우유과자, 연어와 대게, 털게가 가게마다 넘치는 곳이 북해도이다. 그리고 물좋은 생맥주, 뜨거운 된장 라면과 카레, 징기스칸 양고기 철판구이 등이 자랑거리이다. 아열대처럼 부드럽게 내리는 비와 넓은 목초지, 따스한 햇살이 넘치는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도 그리 여유롭고 따뜻한 것 같다. 택시로 두 시간 거리, 요금으로 이십 만원이 드는 라벤다 초원에도 가지 못하고 양고기의 징기스칸 철판구이를 못 먹은 채로 도쿄를 향해서 떠난다. 그러나 언젠가 아니 가까운 시일 안에 북해도 대학의 캠퍼스를 자전거로 돌며 진지하게 공부할 기회를 생각해 본다. 만약 일본에 다시 온다면 그곳은 가을처럼 선선한 바람과 풍성한 과일 그리고 꽃들 그리고 해산물을 비롯해 먹을 것이 풍부한 삿포로일 것이다.
무채색의 바다로 뛰어들 듯 솟아오른 비행기는 몇 번 뒤척이더니 곧 깊은 잠에 빠지듯 고요하다. 물 한 잔 대접하지 않는 항공사의 절약에 놀라며 숨만 쉬다가 내리니 오늘 삿포로 기온은 22도인데 동경은 34도이다. 하네다 공항에서 국철을 갈아타고 다리가 붓도록 걸어서 찾아가는 이케부쿠로의 썬샤인 시티, 프린스 호텔이 새 숙소이다. 1934호. 마침 같은 호텔에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 클럽이 와있다 한다. 여름행사중인 건물 내부에는 지속적으로 소란한 행사 음악이 진행되고 있다.
발을 씻자마자 들떠서 동네 구경을 나갔다. 가까이 미쓰비시, 세부, 파스코 백화점을 끼고있다. 썬샤인 시티 건물 안에도 아기자기한 좋은 가게가 많다. 발이 부어서 신발이나 살까 하고 나갔다가 미쓰비시에서 안티 자외선, 방수처리가 된 올리브색 양산을 하나 사다. 예전 같으면 어머니 양산도 샀으련만... 그는 오래 양산 가게 주변을 서성거린다. 스스키노의 우동 전문점에서 돼지갈비찜에 밥, 소고기 덮밥으로 저녁을 때우다. 태풍이 다가온다더니 역시 서늘하고 강한 바람이 심상치 않다. 북경에 나비가 팔랑거리면 뉴욕에 토네이도가 분다고 했던가? 서울을 비켜온 태풍이 동경을 강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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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아름답다
-정호승
창은 별이 빛날 때만 창이다 희망은 희망을 가질 때만 희망이다
창은 길이 보이고 바람이 불 때만 아름답다 희망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을 때만 아름답다
나그네여, 그래도 이 절망과 어둠 속에서 창을 열고 별을 노래하는 슬픈 사람이 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희망을 낳지 않는데 나그네여, 그 날 밤 총소리에 쫓기며 길을 잃고 죽음의 산길 타던 나그네여
바다가 있어야만 산은 아름답고 별이 빛나야만 창은 아름답다
희망은 외로움 속의 한 순례자 창은 들의 꽃 바람 부는 대로 피었다 사라지는 한 순례자
2003.8.8
푸른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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