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샘
<새처럼 몸이 가벼울 때, >
10/04
<새처럼 몸이 가벼울 때, >
한옥체험관의 티비 없는 밤은 참으로 적요하다. 동네가 그러하니 사람들도 모두 조심스럽다. 어젯밤엔 다경루에서 <집으로>를 상영했다더니 오늘은 <빙하시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전통주 막걸리를 마시려던 가게를 못 찾고 들어와 씻고 누웠다. 읽으려고 가져온 책 <앎과 삶의 공간> <깊이와 넓이> <새들이 떠난 숲은 적막하다>를 꺼내놓고 뒤적이다 잠이 들었다. 풀벌레 소리가 잔잔하다. 가끔 좀 큰 소리로 우는 풀벌레 소리 외엔 밤은 온통 적막고요뿐이다. 방구들은 은은하게 따스하고 방공기는 에어컨으로 적당히 쾌적하다. 부드러운 목면 이부자리에선 남이 쓴 흔적이 전혀 없다. 일류 호텔이라면서도 담배 냄새 배인 침구에 질린 터라 그까지도 너무나 감사하다.
새벽에 또 귓불을 스치는 듯 내리는 빗소리... 잠시 깨었다가 늦잠이 들었다. 아침 식사 드실 준비하라는 직접 모닝콜 소리. 그리고 은근한 아악과 창이 들린다. 뜨거운 온수에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머릿경대 앞에서 화장을 한다. 온갖 재료와 도구를 이용하는 화장법이 부끄럽도록 경대의 모습은 단아하다. 방문을 등지고 밀창을 향해 앉도록 된 경대 위치는 항상 화장하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여주게 되어 있었다. 여닫이와 미닫이 두겹 방문 위로는 가느다란 대발을 준비해 두었다. 발 안의 여인이 책을 읽거나 머리를 빗는 모습은 정말 고혹적이었을 것이다. 마루에 나앉아 기다리며 등을 보인 남자의 모습도 듬직하기만 하다.
아침식사는 안채의 찬방 대청 마루에 준비되어 있다. 교자상을 두 줄로 늘어 세우고 온 객들이 다 나와서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한다. 식탁은 방자 유기로 만든 구첩 반상에다 미역국, 김치찌개와 전유어가 올랐다. 놋그릇 뚜껑들을 조심스레 벗기고 놋수저를 들어 조심스레 식사를 한다. 왕들의 식탁보다도 정갈하고 우아한 식탁 모습이다. 추석이라 들깨 국물에 적신 토란대나물과 고사리 나물, 창란젖과 고추조림, 청포묵과 장조림, 가지나물과 콩자반이 올랐다. 콩자반은 집에서 하듯 무르게 하지않아 딱딱하다. 아마도 잇몸을 튼튼히 할 운동 삼아 그러려니 생각한다. 둥글레차를 숭늉대신 마신다.
찬방 뒤란의 정갈한 모습은 잘 이발한 남자의 뒷통수처럼 상큼하다. 식당 뒤의 지저분한 모습은 항상 밥맛을 감하는데 이곳은 앞뜰의 당당한 장독대와 오밀조밀 작은 텃밭과 함께 모든 것이 조형미 넘치는 구성이다. 작은 호박과 주먹만한 토마토가 푸르게 매달려있다. 건넛집의 노란 호박꽃들이 포근한 이불깃처럼 널려있다. 아, 참 맛난 아침이고 참 상쾌한 출발이 여기 있다. 찬모의 정성 어린 준비와 공들인 한끼 식사 앞에서 나는 삶의 가치와 보람을 느낀다. 전통이 아니라 진지함을 찾아야 하리라. 보수가 아니라 뿌리됨을 찾아가야 하리라. 다시 한 번 李朝의 시작이 여기 있었음은 우연이 아니라 여기게 된다.
식사 후 잠시 마당 쪽에 내달린 마루에 나앉아서 휴식을 취한다. 출발을 앞두고 모두들 여유가 있다. 옆 방 여인은 딸아이의 머리를 땋아주고 있다. 다른 여인은 붓글씨를 쓰겠다는 아들을 위해 먹을 갈아주고 있다. 안방 서재 앞에서 바둑을 두는 형제도 있다. 거문고로 아리랑을 뜯어보는 여대생도 있다. 그녀는 원어민 영어 교육을 하러온 미국인과 동행이다. 그 미국인은 갓을 써보고 있다. 나는 마무리 스냅 사진을 찍고 메모를 하고 있다. 건너편 마루에 석전 황욱선생의 유품전시회가 행사로 걸려있다. 닯아진 붓과 안경, 서첩 그리고 먹과 벼루가 유리장 안에 전시되어 있다. 보랏빛 옥잠화가 피어있다. 노란 분꽃이 지고 있다. 봉숭아가 익은 씨방을 서로 톡톡 터트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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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해진 뒤에 길을 떠나라'
- 고진하
그대가 불행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대의 삶이 타인에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할 때 아직 길을 떠나지 말라.
그대의 존재가 이루지 못한 욕망의 진흙탕일 때, 불면으로 잠 못 이루는 그대의 밤이 사랑의 그믐일 때 아직 길을 떠나지 말라.
쓰디쓴 기억에서 벗어나 까닭 없는 기쁨이 속에서 샘솟을 때, 불평과 원망이 마른풀처럼 밤들었을 때, 신발끈을 매고 길 떠날 준비를 하라.
생生에 대한 온갖 바람이 바람인 듯 사라지고 욕망을 여윈 순결한 사랑이 아침 노을처럼 곱게 피어 오를 때,
단 한 벌의 신발과 지팡이만 지니고도 새처럼 몸이 가벼울 때, 맑은 하늘이 내리시는 상쾌한 기운이 그대의 온몸을 감쌀 때
그대의 길을 떠나라.
2003.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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