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매미속에서 2003
9월 12일 오후 5시
아내를 태우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백화점에 아르바이트 나가는 큰딸을 태우고 오려고 하였으나
아직 손님들이 많아 퇴근할 수 없다 한다.
아내를 태우러 가는 중에도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지기도 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비가 그치기도 하며
변화무쌍한 기후변화를 반복했다.
그러나 하늘은 아주 낮게 검은 구름으로 점점 짙게 다가오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공포감이 느껴진다.
오히려 조용한 평온함이 그 공포감을 더했다.
9월 12일 오후 6시
집으로 돌아와 옥상으로 올라가 루프트레인이 막히지 않게 점검을 하고
거실 남쪽으로 난 대형 유리창과 기둥과 벽 사이에
패널용 강력 스티로폴을 끼워 유리창의 흔들림을 줄이게 하고
동쪽으로 난 대형 창문들에도 완충재들을 끼워 흔들림을 최소화하게 했다.
정전을 대비하여 양초를 준비하여 놓고 폭풍을 기다리며
큰딸이 걱정되어 빨리 마치고 택시 타고 오라 종용하였으나
큰딸은 바깥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는 듯 태연스럽게 답하였다.
...내가 알아서 갈께...걱정하지마..
9월 12일 오후 8시
예상보다 태풍은 서둘러 다가 오기 시작했다.
방송에서 이미 태풍이 남해안에 도착하였다 한다.
창문은 거센 바람에 의해 요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검은 어둠속에서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저주받은 어둠과의 전쟁과도 같았다.
거센 바람에 차들이 흔들리고 각종 부착물들이 떨어져 날아다니고
5층인 거실 창에 가로수 나뭇잎이 날아와 여기 저기 붙기 시작했다.
마치고 택시를 타고 오겠다는 큰딸의 안위가 걱정이 되었다.
택시를 타기 쉽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그 이후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딸에게 다시 전화하여 지금 그리로 갈 터이니 무조건 마치고 나오라 하고.
딸을 데리러 가기 위하여 집을 나섰다.
9월 12일 오후 8시 20분
차를 몰고 폭풍 속으로 들었다.
신호등에 걸려 서있을라치면 부는 바람에 차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승용차로서는 큰 중형차인데도 그랬다.
더 힘든 것은 엄청난 비와 함께 여기 저기서 날아드는 부러진 나무 가지들과
간판들, 그리고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물건들...
신호등이나 가로수, 전봇대 등이 여기 저기서 쓰러지기 시작했다.
차안의 에어컨을 틀었으나 등줄기에 땀이 흥건히 배인다.
강한 바람과 비와 방해물들이 난무하는 속에 차가 물위에서 미끄러진다.
백화점옆 길에 차를 세우고 큰딸을 태우려 기다리는 순간
길 건너 전봇대 변압기 한 개가 대포를 쏘는 듯한 소리를 내며
강한 불꽃을 터뜨리며 폭발한다.
이어 연달아 몇 개의 변압기들이 터지며 전봇대가 도로위를 덮치고
그 파편들이 나의 앞을 지나는 차들을 덮쳤다.
영화에서나 보는 전쟁터, 영락없는 그런 광경이었다.
큰딸을 태우고 그 파편들이 널린 도로를 긴장된 마음으로 지나야 했다.
또 어떤 것이 터져서 우리를 덮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도로에는 많은 부유물들이 널려 있어 무엇이 차에 걸릴지 알 수 없는 상황.
순간 갑자기 차 아래에 무엇인가가 걸린 느낌이 들었다.
노견에 차를 세우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차 아래를 다 둘러보았으나
가로등불이 다 꺼져 어두워서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차를 몰았으나 무엇인가가 분명 차 아래에 붙어있어
차의 주행을 원활하게 하지 못하게 하였다.
순간 엄청난 불안감이 몰려왔다.
이대로 차가 멈춘다면 큰딸과 함께 폭풍 중심속에서
거리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다시 차에서 내려 찬찬히 차 밑을 다 둘러보니 앞바퀴 앞에
하얀 플라스틱 물통 하나가 걸려있었다.
겨우 물통을 끄집어내고 차에 타니 온몸은 비로 하여 흠뻑 젖어 있었다.
아니 빗물을 뒤집어썼다는 표현이 옳았다.
확보되지 않는 시야...등줄기에는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119 소방차들의 싸이렌 소리, 천둥과 번개
언제 무엇이 날아와 우리를 덮칠지 모른다는 불안감.
...아빠 난 이렇게 심각한 상황이란걸 몰랐다..라며
난생 처음 겪어보는 공포감으로 새파랗게 질려 두려워하는 딸아이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농담을 하며 그 아이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사실 나도 많이 두려웠다.
그래도 어드벤쳐 영화를 많이 본 덕분으로
스스로 재난을 피해 빠져나가는 주인공처럼 침착하려 애를 썼다.
이따금씩 차 아래와 차창에 무엇인가가 날아와 때리고 걸리기도 했다. 그 시간이 부산에 폭풍세력이 가장 강했던 시간인 줄 미처 몰랐었다.
겨우 집으로 큰딸아이를 데리고 들어오고 나서야 숨이 막힐 정도로
심장이 아프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나의 가족들이 다 집에 모였다는 안도감과 큰딸아이가 아내와
작은딸에게 신이 나서 하는 우리의 태풍속을 헤쳐온 모험담을 들으며
그나마 가볍게 웃을 수가 있었다.
9월 12일 오후 9시 30분
그러나 그것도 잠깐,
금새라도 창문들을 다 부술 것 같은 엄청난 바람과 비.
천둥과 번개...여기 저기서 터지는 변압기와 네온간판들...
집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지진에 흔들리는 것처럼 집이 흔들렸다.
아내와 아이들을 비교적 안전하게 느껴지는 안방으로 가게하고
나는 거실에 앉아 만약을 대비하고 있었다.
캔 콜라 하나를 마시며 창 밖에서 일어나는 천지개벽의 현장들을 보았다.
아마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이런 모습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문을 꼭꼭 걸어 두었으나 밖에서 전기선이 타는 냄새가 심하게 났다.
하얀빛을 띤 푸른빛 번개가 도시 한 곳으로 떨어지니
곧 이어 노란빛 섬광을 띤 폭발이 일었다.
그런 현상들이 여기 저기서 일어났다.
불이 나갔다 다시 켜지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이내 모든 것이 다 어두워졌다.
온 도시가 암흑 속에 갇혀버렸다. 정전.
멀리 부두의 조명 빛과 비상 발전기를 사용하는 병원의 불빛과
번개와 천둥, 터지는 변압기의 불꽃들만이 살아남았다.
에어컨, 선풍기, 냉장고, 컴퓨터, 정수기, 전자 렌지, 텔레비젼,
전화등 모든 것이 멈추었다.
이내 실내가 습하고 더운 공기로 채워지고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안의 깊은 어둠과 침묵, 그리고 공포.
바깥의 천지 개벽과 같은 소용돌이와 사이렌 소리.
9월 12일 밤 11시
갑자기 비와 바람이 숨을 죽였다.
온 도시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약 3 시간 동안의 격정적인 순간과 공포를 남기고...
예상보다 너무 일찍 끝나 허탈감 마저 들 정도였다.
아내와 딸들은 안방에서 촛불을 켜놓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따금씩 안도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난 촛불을 들고 욕실로 가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비에 흠뻑 젖은 겉옷은 돌아와 갈아입었으나 속옷은 갈아입지를 못해
땀과 비에 눅눅히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틀지 못하는 상황이어서 더욱 더 그랬다.
만일에 대비하여 아내와 딸들을 안방에서 같이 자게 하고
나는 거실에 앉아 촛불 4개를 켜놓고 세계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대륙을 횡단하여 유럽을 구석구석 돌고
다시 유라시아 대륙의 남쪽을 따라 돌아오는 270일간의
여행을 상상했다.
새벽 두시경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판단될 시점에
소파에 기대어 앉은 채 잠이 들었다.
9월 13일 오전
오전 10시경 전기가 들어왔다.
그나마 우린 수돗물이 정상적으로 나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차도 다친 곳이 없었다.
그러나 텔레비젼과 인터넷은 되지 않는다.
유선이 끊겼기 때문이다.
언제 복구될지 확실치 않다고 한다.
9월 13일 오후
사무실로 출근했던 c 소장으로부터 급보가 날아들었다.
빌딩의 고층에 위치한 우리 사무실.
새로 지은 건물이었지만 태풍에 의해 창문 몇 개가 날아갔는데
그 중 하나가 내 방 남쪽에 있는 프로젝트 창이 날아가
내 방이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연락이었다.
서둘러 사무실로 가보니 내 방은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모든 서류들이 다 날아가 바닥에 흩어져 있고 바람에 의해
천장 일부가 뜯겨져 내려앉았다.
사무실로 가는 길목의 사직 종합운동장의 하얀 천 지붕이 뜯겨져
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고층 아파트들의 베란다 창들이 군데군데 다 날아가고 깨어져 있었다.
뿌리뽑힌 가로수와 가로등들...
9월 14일 오전부터
사무실 복구 작업으로 보내야 하는 하루였다.
오늘밤에 올려야 할 칼럼을 넣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걱정을 했는데
저녁무렵에야 인터넷과 텔레비젼 시청이 가능해졌다.
태풍 매미...
난 그 격동 속에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