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덤의 삶
독서에 관한... 2003
1. 가난함이 도서관.
초등학교 3학년.
시내 중심가 기와집에서 살던 부자집 아이가
하루아침에 교통부 고지대 함석지붕집 단칸방으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마저 돈벌러 간다고 멀리 떠나버리고,
어머니와 단 둘이 낯선 부산 땅에 남겨졌다.
학교가면 아이들이
....서울내기, 다마내기, 고래고기....하며 놀려대는 통에 친구 사귀기도 어려웠고
허름하고 작은 산동네 집으로 일찍 돌아가기도 싫었다.
그래서 가방을 울러 매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서면을 지나는 전차를 구경하러 가는 일이 좋았다.
그러다 서면가는 길에 가로흐르던 개울,
동천가에 있던 옛 서면 시립 아동 도서관.
남쪽으로 난 넓고 큰 창으로 하여 언제나 밝은 빛이 가득한 곳을
전차 구경하러 가다 우연히 만났다.
방과후에는 언제나 혼자 그리로 가서
<아라비안 나이트><안데르센 동화집><이솝이야기>등의
그림 동화책을 읽으며 그 신비한 세계 속을 여행하다
해가 지기 전에 둥그런 나무통속에서 꺼내주는 커다란 달걀처럼 생긴
아이스케키( 그렇게 불렀던 것으로 기억)를 빨아먹으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2. 독서의 날이면 상 받는 아이
중학생이 되었을 때도 아버지는 돌아오시지 않았다.
객지 생활을 하시던 중에 내가 훗날 작은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는
또 한 분의 어머니가 생긴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가난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 환경 탓으로 성격은 점점 내성적인 아이로 성장하여 갔다.
방과후에는 어김없이 학교 도서관에 들어
형광등 불빛이 온몸을 하얗게 염색시킨 후에야 어두운 교정을 나와 집으로 갔다.
책이 좋아 도서관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갈 곳이 없어 갔었다.
처음에는 위인전들을 읽었다.
세종대왕, 을지문덕 장군, 광개토 대왕,....처어칠까지.
그러다 셔울록홈즈의 코난도일, 루팡의 모리스 르블랑의 추리소설에 맛을 붙여
추리소설이란 소설은 다 읽어대기 시작했다.
일요일과 방학을 빼고는 매일 방과후 학교 도서관에 오는 아이.
독서의 날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 불려나가 상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質적으로는 부끄러운 일이나 量적으로는 엄청나게 읽었으니까...
두툼한 책 뭉치를 상으로 건네 주시던 교감선생님이 씨익 웃으시며 하신 한마디.
.... 코털 깎아라 !
3. 습관은 생활이 되고...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한 방과후 도서관으로 가는 일은 습관이 되고
그것은 생활화되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했으나 그것보다는 도서관에 가길 더 즐겼다.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그 친구( 첫 번째 기적에서 나를 성당을 데리고 간 친구)는
고등학교 시절 때 매일 방과후 같이 도서관에 가던 무협지 친구였다.
우린 죽기 살기로 무협지를 읽었다.
특히 중국작가 와룡생의 무협지는 백미였다.
그 시절에 삼국지, 열국지, 수호전등도 읽었다.
저녁이 되면 둘이 책가방을 팔에다 걸고 시장통에서 파는 꽈배기 하나씩
입에다 물고 그 날 읽은 무림세계 속의 무용담을 주고받으며
동천 철로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4. 성당집 아이와 <행복한 죽음>
고3 시절.
가까운 친구들이 모여 학교 근처 낮은 언덕 위에 있는 작은 성당.
친구의 집 앞에 있는 작은 성당의 마루바닥에 모여 앉아 대입 공부를 했다.
성당 분소 같은 곳이었는데 친구의 어머니가 관리하는 곳.
조용하고 뒷산에서 들려오는 새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곳이었다.
그 성당집 친구가 공부하다 쉴 때 읽으라며 건네준 책.
알베르 까뮈의 <행복한 죽음>
그 책 한 권으로 하여 나의 문학관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부터 공부하는 틈틈이 알베르 까뮈를 찾았다.
소설<이방인><페스트><전락>등과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스의 신화><여름><결혼><작가수첩><여행일기>등,
희곡<오해><정의의 사람들>등을 이해를 다 하지 못하면서도 무작정 읽으며
스스로를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라 칭하고 알베르 까뮈를 우상화하기 시작했다.
5. 첫사랑 소녀가 건네준 헤르만 헷세
나와 동갑이나 일곱 살에 학교를 들어가 일년 먼저 고등학교를 졸업한 소녀.
제법 큰 회사의 신입 경리사원으로 취직한 그 소녀는
나의 일생에서 아주 중요한 기억과 추억을 남겨 주었다.
( 다음 편에 쓸 영화 이야기에서도...)
공부만 너무 하면 오히려 나쁘다며 자기가 먼저 읽고 건네주던 책들...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앙드레 말로의 < 왕도>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장폴사르뜨의 <말>, 오 헨리의 단편집. 등
나는 그녀가 건네주는 책들을 꼬박 꼬박 읽었다.
그리고 그녀의 요구대로 간단한 독후감들을 적어 건네 주었다.
어느 날 그녀가 자기 때문에 내가 대학 입시에 소홀하게 되는 것 같아 두렵다며
대학에 들어간 후 만나자는 메모를 남기고 훌쩍 이사를 가버렸을 때까지...
그녀는 그렇게 떠나고 다시는 만날 수 없었지만
나의 감성을 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 준 첫사랑이었다.
6. 청년기의 낭만적 독서기
셍 떽쥐베리의 <어린 왕자>, 리쳐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에밀 아자르의 <자기앞의 生>등 동화적이며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소설들에 이어
솔제니친의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로부터 시작되는 르포르타주 소설들에 빠져
독일작가 레마르크에 심취하게 되는 시절이었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 <개선문>, <생명의 불꽃>, <사랑할 때와 죽을 때>,
<검은 오벨리스크>, <리스본의 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등과
노벨 문학상 수상작들을 골라 읽기도 하며,
사랑에 빠졌을 때, 시를 쓰기 위하여 시집들을 읽었다.
하인리히 하이네, 라이너 마리아 릴케, 李想의 시와 소설과 낙서들...
감성적이며 신미적인 소설로 지금까지 가슴에 남은
가와바따 야스나리의 <설국> 힐튼의 <잃어버린 지평선>
나의 청년기는 독서일기를 쓰며 날마다 새로운 세계로
상상여행을 떠나는 낭만적 독서시절이었다.
7. 생존 을 위한 책읽기.
결혼 후 새벽 서너시까지 계속된 책읽기는
미래를 위한 생존의 책읽기로 시작되었다.
각종 자격증들을 따기 위해 전문 서적들을 읽었다.
처음에는 건축기사 시험부터 시작하여
건축설계에 필수적인 자격증이 아닌 소방기사, 조경기사 자격증까지 땄다.
한 달만 밤에 공부를 하면 자격증이 하나씩 생겼다.
그 재미로 쉬지 않고 자격증 따는 공부를 매일 새벽까지 했다.
건축 전문서적뿐 아니라 각 대학에서 매년 춘, 추계에 나오는
건축관련 논문집들을 구해 읽고, 각종 건축관련 보고서들을 구해 읽었다.
공부를 한다기 보담은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더 강했었다.
한번 습관 된 책읽기와 공부하기는 멈추기가 힘들었다.
집에 돌아와서 책상 앞에 앉지 않으면 견디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습관 된 책읽기로 가장 재미를 본 것은 건축사 시험이었다.
건축사 시험.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목표였으며 내 삶의 質을 바꾸게 될 시험.
그 당시만 해도 사법고시에 버금갈 정도로 어렵다고 인정해 주던 시험.
( 지금은 아주 많이 쉬워진 건축사 시험이긴 하지만...)
어떤 이들은 오랫동안 회사를 쉬면서 학원도 다니고, 산에 들어가 공부를 해도
몇 년 또는 십 년 가까이 몇 번씩 떨어져도 걸리기 힘들다는 시험.
나는 회사를 계속 다니며 새벽에만 조금씩 혼자서 공부를 하였다.
1차 시험 전 한달, 2차 시험 전 3주.
그것이 건축사 공부의 전부였다. 단 한번만에 시험에 걸렸다.
그것도 2 차 시험을 마치고 난 날, 다른 이들이 그 결과를 두고 전전긍긍할 때,
나는 이미 합격했다는 자신감이 생겨 저절로 나오는 기쁨을 참지 못해
혼자 홍익대학을 빠져나와 남산으로 올라 시원한 콜라 한잔을 마시며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습관화된 책읽기로 엄청나게 빨라진 책 읽는 속도와.
그 책 안에 숨어 있는 핵심을 빨리 찾아내는 요령을 배웠고,
새벽마다 읽은 건축 논문집들과 보고서들 때문에
굳이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하지 않아도 합격의 기쁨을 가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런 독서의 습관 때문에 난 어떤 시험도 떨어져 본 적이 없고,
어떤 시험도 한달 이상 공부해 본적이 없다.
(운전면허 필기시험은 시험전날 저녁에 공부하고 필기시험 점수 4등을 했다)
독서는 감성을 키워주고 지식의 폭을 넓혀주는 것 외에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행복한 생존의 방법을 남겨주었다.
그 대신,
남자로서 최고의 황금기라는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에 이르는 날들을
일과 공부로서 보낸 아쉬움이 남아있기는 했었다.
8. 우리 집 화장실은 도서관
그 이후 사업이라는 이름의 건조한 괴물 때문에
책 읽기가 쉽지 않았다.
컴퓨터가 활성화되고 난 이후에는 더더욱 그렇다.
예전 같으면 책을 읽을 시간에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책을 읽는 시간은 별로 많지 않다.
칼럼을 쓰기 위하여 가끔 서점에 들려 책을 고르고
필요한 자료들을 뽑기 위해 옛 기억을 되살리며 책장을 넘길 때뿐이다.
그 대신 우리 집 화장실(욕실)이 도서관이 되었다.
아내의 ...읽은 책은 다 제자리로 돌려놔라...는 계속되는 투정에도
변기 뒤 선반이나 세면대 선반 위에는 항상 많은 책들이 쌓여 있다.
큰딸아이가 보는 패션잡지들과 유행잡지들..
작은 딸아이가 보는 SF소설들...
내가 보는 GEO(지오 그래픽) 잡지들과 <잃어버린 세계>들과 같은 책들이...
우리 집 화장실은 작은 도서관입니다.
9. 책을 사랑하는 지인들..
그러다 작년부터 사무실에서 조금씩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장 그리니에의 엣세이들과,
알베르 까뮈의 뒤늦게 출간된 책들...
칼럼에서 만나 좋은 친구가 되어주신 분들이 보내 주신 책들..
푸른샘님께서 선별하여 주신 책들과
오정순 선생님의 수필집들과,
서은님의 시집,
여울소나무님께서 보내 주신 책 <빵이 되는 꿈>.
부배의 연인님께서 보내주신 <가시나무새>
칼럼 제자 김희경님이 보내주시는 <미술세계> 잡지들..
올리비에 룰랭의 <수단 항구>
릴케의 < 그 푸른 영혼의 푸른 불꽃>
다시 한번 더 읽고 싶었던 가와바따 야스나리의 <설국>등이
책상 위에 놓여져 있습니다.
책을 사랑하시는 지인들의 고마우신 배려로 하여
그나마 사무실에서 틈틈히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10. 처음과 마지막
내게 첫사랑으로 기억된 소녀가
책들을 건네주고 독후감을 쓰게 하였고
내가 마지막(?) 이름으로 남겨놓고 싶은 살로메가
책을 건네주고 독후감을 말하라 하였습니다.
살로메가 건네준 마지막 책은 < 향수> 였습니다.
그 바쁜 와중에서도 단숨에 그 책을 읽고 그녀에게
독후감 시험을 치뤄야 했습니다.
....이 책에서 작가가 의도한 메세지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
....주인공이 여기 저기 오랜 방황을 한 의도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
책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다
또 다른 아름다운 세계들을 덤으로 살게 하는
그래서 한번 살다 가는 짧은 삶을 더 길게 느끼고 살게 하는
신기루 같은, 기적 같은 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책은
현실의 삶보다 더 아름다운 덤의 삶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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