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샘
바다에 와서...
07/25
바다에 와서
-홍 수희
바다에 와서 산을 바라봅니다
산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듯이
바다에 와서 산을 바라보는 일은
액자 속에 당신을 매달아 두고
유리판 너머로만 만지작거리는
쓸쓸하고 여전히 외로운 일이지만
오래 기다리는 이 비통(悲痛)도
아름다움인 줄을 아는 까닭에
나, 이대로 사랑이 되기 위하여
바다에 와서 바다를 바라보지 않고
바다에 와서 산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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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20 우이도 의료 봉사에 다녀와서 적어둔 글, 심심풀이 삼아 읽어주세요...
마음의 그늘을 털어버리려 여행을 떠난다는 이가 부럽습니다. 나는 어쩌면 항상 마음에 새로운 짐과 그늘을 더하기 위해서 집을 나서는 까닭입니다. 밋밋하기 짝이 없던 일상이 여행에서 마주치는 새로운 배경 그림과 그 안에서 풍겨나오는 향기 혹은 빛의 산란에 의해서 다른 시각으로 조명되며 주요 등장인물인 나 자신의 행태와 심상을 다잡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칠월 초에 다녀온 덕유산에서는 산자락의 그 깊고 온화한 품에서 흠씬 적신 진한 솔향기가 나로하여금 더욱 진지하게 집중하며 열정을 가지고 살기로 다짐하는 계기를 주었습니다. 그런 후의 내 일과들은 <무주 구상>에 의해 좀 더 치밀하게 정리되어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번 주초에 다녀온 고산 윤선도의 섬, 보길도에서 만난 거울처럼 눈부신 태양아래 다져본 생각 <보길도 계획>은 스스로 한 사람의 쇼우 맨이 되어야한다는 것이었지요. 왜냐면 요즘 자주 듣는 품위유지비 항목에 비율을 올리라는 어쩌면 가당치않고 어쩌면 충정 어린 농담을 새겨듣기로 한 탓입니다. 사회생활의 평가는 때로 어이없는 것에서 점수를 올리기도한다는 것을 익히 알면서도 일체 무시하고 내 간편함을 고집부리는 것은 무모하고 경쟁력 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할까요? 아니 그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루함을 주는 외연를 버리고 항상 신선하고 매력있는 새모습을 연출하기로 신경의 방향을 선회한 것이지요.
이렇게 세월의 여울을 따라 흐르며 굽이치며 만나는 여행의 충격은 때로 한줄기 바람이나 한 덩이의 구름 혹은 안개 한 자락으로 다가와, 때로 나를 침잠케 하며 때로 열정과 몰입으로 인도하며 결국은 비상하는 새의 날개짓을 닮고싶게 합니다. 연달아 계획되어 있는 여행의 피로를 감안하여 역할을 줄이고 가볍게 따라 떠난 의료 봉사는 여름 방학 숙제의 첫 페이지처럼 설레게하는 뭉게구름을 이고 출발하였습니다. 비릿하게 고인 물의 연안을 벗어나자 곧장 나타나는 다도해의 섬, 섬들 사이로 해안경비정의 거침없는 질주는 먼 바다에서 짙어지는 바다안개를 찢으며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립니다. 갑판에 서서 안개보다 고운 바다 수증기에 살이 젖을 무렵 배는 뿌우뿌우하는 신호음을 내던지며 섬의 선착장에 접근합니다.
올해도 끊임없이 해무를 피워올리는 우이산 허리 아래 낡은 학교는 해풍에 씻겨서 닯아진 차돌처럼 모서리가 둥그스름합니다. 안마당처럼 오목하게 안아들이는 운동장 철봉대에 널려진 그물코에도 성글게 안개비가 걸립니다. 폐교 직전이라 비어버린 적막한 교실에는 먼지처럼 허옇게 소금기 베인 미역들이 널려있어 바닷냄새를 물씬 풍겨줍니다. 아, 모든 것이 낡아가고 허물어지고 드디어 사라지고 있습니다. 빈 교실의 뒷쪽으로 삐걱거리는 복도에다 짐을 부리고 돌아다보니 뒷창 가까이 다가와 손짓하는 것은 푸른 식물 이파리들의 환호입니다.
숨 죽이고 엎드린 교실 바닥을 걸레질하고 창문에 방충망을 달고 군데군데 백열등을 가설하니 그런대로 사람 온기가 돌고 청춘들의 쉼없는 재잘거림이 채워지자 살아움직이는 사이보그 건물처럼 들썩거리기까지 합니다. 약간 푸른기가 도는 샘물을 떠서 밥을 지으며 소꿉놀이같은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애들은 마냥 즐거운 모양입니다. 대충 베이스 캠프를 치는 일이 끝나자 낚시대를 들고 나서는 동료를 따라 해으름 들판을 지나 방파제로 나갔습니다. 바다는 이제 스러진 안개 위로 볼록하게 도드라진 배를 일렁이며 길고 고른 호흡을 내쉬고 있습니다. 갈매기 두어 마리만이 건너 편 무인도를 떠돌고있어 눈길을 당길 뿐입니다.
무인도... 아무도 살지않는 그 섬에 어느 누가 그토록 많은 파도를 부려다주었는지 깍일대로 깍인 다리를 오그리고 엉성하게 서있는 마른 소나무들의 팔뚝이 문득 날아오를듯 푸드득거리는 환상을 봅니다. 순간에 해변으로 번지는 날개들의 환영은 무수한 삼각파도가 되어 흔들립니다. 내 아직 순결한 그대를 향한 항해를 멈추지 못하리라. 어디에 있는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희망봉을 돌아 안개에 젖으며 햇살에 마르며 허옇게 분이 피어 뻣뻣해진 빈 땟목으로 남을지라도 하얀 손수건 한 장 꽂아둘 마른 대지를 찾아 쉼없이 저어가리라.
오후는 벗겨지는 해무로 시간이 갈수록 더욱 청명합니다. 굵은 갯지렁이 한토막의 유혹에 순진한 섬 물고기들이 잘도 넘어갑니다. 연신 낚아올리며 이런 경우는 십타수 중의 일안타라고 즐거워하는 이 곁에서 광어, 노래미, 뱀장어, 뿔소라 날회를 쳐서 찰지고 고소한 살점들을 씹은 입에 소주를 털어넣습니다. 그것은 티없이 투명하게 증류된 술, 타고 또 타서 남은 완전 무색의 액체, 가슴에 붉은 화인만이 선명한 불같은 술입니다. 망망한 바다를 직시하며 모든 감각이 불투명하게 번지고 흐려져서 얼얼하게 두들겨맞은 몸처럼 무감각해지도록, 닐 줄을 풀어당기며 심해 깊숙이 잠수하는 의식의 납덩이를 던졌습니다.
돌담으로 잘 가리어진 콩밭의 콩줄기들은 오후가 되면서 쏟아지는 햇살을 손바닥 활짝 펴서 가리고 있습니다. 그 콩밭가 돌담께에 서서 문득 허공중의 그대를 수신합니다. 안개처럼 아늑하고 부드러워서 발디딜 곳 없이 허청거리게 하는 목소리... 그대는 떠다니는 한조각 몽실몽실한 구름뭉치같은 편안함으로 감싸주며 섬에서의 단속된 시간들을 안도하게 합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사랑이란 아마도 너무 커다란 것은 아니겠지요. 아주 사소하도록 작은, 그러나 더할 수 없이 소중해서 잊혀지지않는 보석처럼, 별처럼 명멸하는 존재일 것입니다. 유쾌하게 날리던 웃음이 메아리되어 그 돌담 곁을 지날 때마다 다시 들려옵니다.
밤 바다... 원액의 먹물을 뿌려대며 모든 것을 지워버릴 듯 섬을 향해 전력으로 투항하던 파도는 발 아래 가까이 다가오자 길들은 강아지처럼 유순해집니다. 담담하게 가라앉은 바윗돌을 어루만지듯 느리고 부드러운 혓바닥같은 파도입니다. 밤에 드는 밀물따라 갯가로 달려온 우럭들은 어두운 바위 아래 깊은 소를 잠자리 삼아 찾아들고 있습니다. 먹이를 구걸하는 유원지의 잉어떼처럼 수 십마리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며 먹물같은 어둠 속에서도 불빛을 쫓아 다닙니다. 별없는 밤에 피우는 쑥불처럼 하루살이나 모기들 유인하던 불빛이 문득 두려움이 됩니다.
꾀꼬리 울음소리로 밤새 뒤척이던 설잠이 마져 깨집니다. 불투명하게 번지던 어둠을 던지고미명은 맑고 고요하게 밝아옵니다. 홀로 지내는 진료소장의 사택에서 객지잠을 잔 것이 뚜렷이 서러워져서 일출을 보리라 집을 나섭니다. 능소화꽃 수북히 떨어진 골목길로 이어지는 돌담은 오래 해묵은 이끼와 버섯과 양치식물들로 푸른 녹빛을 띄고있습니다. 손가락으로 만지니 손 끝에 푸른물이 번져듭니다. 바다는 하늘과 함게 밝아지며 먼 섬의 스카이라인 선명한 자국 위로 밀생한 혹은 조생한 소나무의 검은 실루엣을 섬세하게 그려놉니다. 산들은 구름 위로 부표처럼 떠올라 종이로 오려 만든 여름방학숙제 공작 만들기를 기억나게 합니다.
일출은 엷은 안개 속에 풀어지고 보드랍게 녹아버릴 듯 아름다운 산의 이마 위로 만년설 쌓인 듯 눈부신 구름이 흩어집니다. 산 넘어 모래언덕까지 걸어서 다녀오기로 나선 숲길엔 느닺없이 갈색의 까투리 날아오르고 종달이 우는 소리는 높고 투명하게 숲 위로 흩어집니다. 상수리 나무 잎새 위로 쏟아지는 칠월의 청량한 기운이 몹시도 아름다운 여름 숲 속입니다. 여름 장마비 흘러내리던 골짜기 파인 틈으로 좁게 난 길을 헤치며 이따금 뿌리는 보슬비에 젖어서 온몸이 찐 옥수수처럼 김이 나도록 걸었습니다. 문득 만난 죽장을 든 노인이 아직도 한 고개가 남아있고 합니다. 퇴각할 시간을 맞추어보다가 아무래도 식전에 다녀오기로는 무모하다고 결론지어져서 돌아서 내려왔습니다.
하산하는 길은 언제나 산의 정수리와 머리카락이 자세히 보입니다. 자태좋은 적송의 가지와 해송의 가지를 비교해보며 언급하고 주홍빛 산나리 요염한 꽃가지를 엉컹퀴, 싸리꽃, 이태리 들국화와 섞어서 한묶음 꽃다발을 만들어 쥐고 내려옵니다. 내 마음이 가장 한가롭고 행복한 시간이면 항상 그대를 생각하였습니다. 야생화 꽃다발을 움켜쥔 손을 가슴에 그러안고 보이지않는 향기를 그리워합니다. 향기는 아침의 첫이슬처럼 떨어지거나 지워지지 않는 계곡의 물줄기가 되어 가슴 한복판에 난 짙푸른 그늘 아래로 스며듭니다. 수풀 사이에 엎드려 샘물을 움켜마시고 손을 씻어 봅니다.
썰물 나가는 길은 온도차 심한 육풍 탓으로 해무가 심해집니다. 섬에서의 탈출은 또 다시 막연한 걱정으로 모락모락 피어납니다. 주의보가 내리면 며칠이고 묶여야되는 섬의 생리가 여전히 버리지 못한 조급증을 부플립니다. 아침에 수풀 속을 헤집고 다니며 풀모기에 물린 곳이 가렵더니 붉은 반점이 되어 남았습니다. 뱀에 물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라는 견적에 꾹 참으며 돌아갈 배를 기다립니다. 온몸이 검붉게 그슬리고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흩어져 날립니다. 바다 그리고 사람... 아마도 바다는 언제나 승자일꺼라는 생각이 헤밍웨이의 바다에서처럼 실감됩니다.
'01.7.25 아직 미완인 푸른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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