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샘
바다의 미풍따라... 여름 스켓치
07/27
육체는 슬퍼라!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었다.
떠나자! 멀리 떠나자!
새들은 낯선 물거품과 하늘에 이미 취하였다.
눈매에 비친 낡은 정원도 그 무엇도
바닷물에 젖은 내 마음을 잡아두지 못하리.
오, 밤이여! 잡아두지 못하리,
흰 빛이 지켜주는 백지, 그 위에 쏟아지는 황폐한 눈부심도,
어린 아이에게 젖을 물린 젊은 아내도.
나는 떠나리라 水夫여,
그대는 돛을 흔들어 세우고 닻을 올려
이국의 자연으로 항해하라.
................
..........................』
《 말라르메 '바다의 미풍' 중에서 》
**7/16-17 여름 스켓치
물에 젖은 도시를 떠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흐린 잿빛 하늘 아래 푸른 들판의 식물들은 왕성한 녹색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논은 마치 푸른 브럿쉬처럼 까실까실한 촉수를 세우고 잿빛 찡그린 하늘의 때라도 밀어줄 듯 하였습니다. 곧게 뻗은 외곽도로를 향해 소실점을 찾으며 달리는 질주의 느낌은 현기증까지 일으킵니다. 방조제로 가로막힌 해수와 담수 양쪽에 각기 다른 낚싯대를 드리운 낚시군들이 묵묵히 도열해 있습니다. 바다도 하늘따라서 흐리고 잠잠합니다.
여름은 아무래도 식물성의 계절인가 봅니다. 벌써 꽃 피운 깨밭을 지나 잎사귀와 줄기 무성한 고구마밭, 그리고 짙푸르게 가지 뻗은 고추밭을 바라보며 내 밭의 어린 작물들을 애잔히 생각합니다. 비료도 충분치 못하고 살충이나 제초에도 무지한 주인을 따라 겨우겨우 부지하고 있는 목숨인 탓입니다. 흐린 하늘로 숨 죽이며 날아가는 새, 낮게 떠도는 잠자리떼, 노오란 달맞이꽃, 순백의 무궁화, 보랏빛 도라지꽃 위로 소나기로,안개비로 내리면서도 무리진 구름따라 쏟아지는 것이 하늘의 구획 때문인지 땅의 굴곡 때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산 속으로 접어들자 드문드문 인디언 살빛같은 붉은 황토가 기름지게 보이는 해남땅입니다. 그런 진흙색을 테라코타라 한다나요? 아무튼 산 사이의 골마다 촉촉이 물을 가두어 둔 백야나 월강 마을 들판은 건강하고 광활하기만 합니다. 힘없는 제비나비 한 마리 차창을 따라 날아오다 멀어집니다. 옅고 짙은 녹색 들판에 주홍빛 산나리 홀로 요염하게 피어있습니다. <조개잡이체험어장>을 안내하는 팻말따라 땅끝까지 8킬로미터를 달리는데 어느새 바다는 우측 팔을 부뜰고 동행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허준의 촬영지로 쓰였던 바닷가에 닿았습니다. 쓸쓸한 무인도 두엇을 앞바다에 띄우고 망망한 서해의 갯뻘을 앞둔 고적하고 외로운 둔덕이었습니다. 낡은 나무석가래와 짚흙을 섞어서 댓가지와 노끈으로 엮어진 엉성한 셋트가 더욱 애처럽고 고달프게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셋트장 곁에 이름없는 민묘 하나가 보랏빛 엉컹퀴꽃에 둘러싸여 찾아온 이들을 맞고있었습니다. 한 때는 매끈한 서울 사투리들의 소란에 더욱 어리둥절하게 구경하고 있었을 그 무덤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궁금해졌습니다. 거진 가루가 다 된 조개무지, 쓸쓸히 울 아래 핀 봉숭아, 연둣빛 답싸리만이 여늬 해변가 섬집같은 모습입니다.
봉숭아 꽃 두엇을 뜯어서 손가락으로 짓이겨 엄지 손가락 둘에 꽃물을 들였습니다. 사람이 무엇에 전념할 때, 그 대상은 학문이나 예술이나 사랑이겠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향한, 자기 자신을 위한 열정의 변형된 모습 아닐까요? 너를 사랑한다함도 나를 사랑하는 한 방법이며, 한 행위이며, 또한 추억이니까요. 지금 들인 이 봉숭아 꽃물은 엄지 손가락에 희미한 주홍빛으로 오래 남아서 한 시간을, 한 공간을, 그 안을 스치던 한 존재의 행위를 조용히 기억해 줄테니까요.
언젠가 만난 잊을 수 없이 아름답고 황홀했던 낙조를 다시 보기위해 해남의 송호리 해변가로 향했습니다. 바다는 어디서부턴지 잿빛 하늘을 벗어버리고 흩어진 일광을 모아 하얗게 거울면처럼 반짝이며 누워있었습니다. 그 서슬에밀린 구름도 공단빛 옷자락 길게끄는 우아한 양으로 둘러서있습니다. 미풍에 몸을 맡기고 모래 사장을 느리게 걸어봅니다. 파도 소리인지 바람 소리인지 더 깊은 곳으로 부르는 듯해서 선착장으로 달려갑니다. 계획 없이 만난 철선에 차와 몸을 싣고 윤선도의 유배지, 보길도로 떠납니다.
짙푸른 바다 멀리 섬들은 모두 신비롭게푸른 안개에 덮여있습니다. 해무에 발담구고 끝없이 피어오르는 물방울들을 고스란히 휘감으며 서있는 섬들의 자태는 한없이 유순하고 담담합니다. 어쩌면 무인도들... 솔가지 갸웃이 돋아난 섬의 등성이에 갈매기 쉬었다가 멈짓 날아 오릅니다. 섬의 공기는 서늘하고 끈끈한 그러나 알 수 없는 관능의 흐름이 도사린 축축한 습기를 머금고 있습니다. 그 품에서 다시 벗어나기 어려우리라는 막연한 두려움같은 흡인의 관능입니다.
배를 타고 흔들리는 것은 내게 먼 요람의 기억을 되살려 줍니다. 잔잔한 바다 위를 달리는부드러운 롤링이 어머니의 손길을 따라 잠이 들던 바로 그 흔들림의 쾌미를 일깨워줍니다. 안개의 흐름 따라 풀어지듯 번져가는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시작된 꿈길 따라서 바닷 속 깊숙이 잠수해 들어갑니다. 냉각된 해풍은 서늘함 속에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고 다정한 온기를 담아 불어줍니다. 객실 안까지 서늘하게 들어오는 바람에 젖은 몸을 펴말리는 오징어나 명태 혹은 김이나 미역처럼 길게 몸을 눕히고 그대로 깊은 오수에 빠져듭니다.
보길도는 강하고 힘찬 섬입니다. 여늬 섬들처럼 쓸쓸하거나 초라하지 않습니다. 갈피갈피에 숨은 풍부한 수량처럼 윤기 흐르는 돈과 젊음이 스며있습니다. 그 뒤를 받쳐주는 유림의 뿌리와 자부심이 어쩌면 더 큰 힘이겠습니다. 섬의 좌측에 있는 적송의 방풍림 예송리를 향해서 달립니다. 몸피가 붉고 겉이 엷은 적송은 벽돌빛 붉은 색으로 건강미가 넘치는 여성적인 소나무입니다. 그런 적송으로 울울창창한 산이 바람벽이 되는 예송리 마을은 파도에 닯을대로 닯은 갯돌이 수킬로 널린 아름다운 해변을 갖고 있습니다. 한없이 부드러운 파도에 짜르락 짜라락 몸을 굴리며 쉼없는 해조음에 밑가락을 넣고 있습니다.
밤에는 먹물을 원액으로 흘려놓은 듯 검디 검던 시야가 먼 등대의 불빛과 방파제 하얀 자국으로 아스라이 부피를 불리며 원근의 느낌을 주었습니다. 뒤숲에서 꾹꾹거리는 산꿩소리가 더 잠을 밀어내버리고 해풍은 더욱 서늘하게 불어왔습니다. 문득 낮에 본 세연정의 어부사시사, 여름편의 머릿부분을 되살려 보았습니다. 아마도<구즌 비 긋치자 시냇물 말가진다.>였지요. 이곳 섬으로 떠나온 후론 도시에 내리던 장마비를 까맣게 잊었습니다. 아직 남았던 안개만이 일몰의 아름다움을 끄적끄적 흐트러 놓았지요.
다음날 이른 아침, 예송리를 드나드는 산길의 봉우리에 있는 이름없는 정자에 올라 마을을 조망하였습니다. 두어개의 우람한 산봉우리 아래 해송으로 방풍을 한 반월형의 해안을 끼고 마을은 곱게 앉아 있습니다. 앞 바다 가득 김이나 다시마, 톳이나 미역의 발장을 펼치고 있어서 바다는 잘게 쪼개진 기와지붕처럼 정연하게 반짝거립니다. 밤새 파도따라 사그락 거리던 물젖은 갯돌의 검은 빛이 해안에 짙은 아우트라인을 그리고 있습니다. 일출은 소문도 없이 둥실 떠올라 바다 표면을 일시에 거울처럼 환하게 반짝거리게 합니다.
새해가 떠오르며 새날이 오는 것이, 섬에서는 항상 신천지의 도래처럼 산뜻하고 찬란합니다. 떠나온 물에 젖은 도시의 기억을 사그리 지우고도 남은 햇살이 문득 파라다이스로의 여행을 생각나게 합니다. 햇살은 화살처럼 곧고 반짝이는 새 것입니다. 숲에선 미성의 꾀꼬리가 화사하고 우아하게 노래합니다. 새소리 따라 깨인 아침을 눈부시게 힌옷으로 갈아입은 어부가 발장을 살피러 홀로 노저어 나갑니다. 뒤따르는 갈라진 물살은 시립한 종들처럼 순종적입니다.
예송리 산안개가 온몸에 서늘하게 배어들 때쯤이면 적송 나무 스친 솔바람 소리도 싸아하게 들립니다. 높다랗게 자리한 사각정자 위에서 노랑과 초록의 꾀꼬리 청명한 울음을 담아 이 때 마시는 <솔잎차>는 환상적입니다. 온몸을 휘돌아나가는 알싸한 향기와 진득한 단맛, 아슴한 알콜기로 입안 구석구석이 놀라서 깨어나면 비강을 따라 뇌속까지 번지는 향이 푸른 바늘처럼 자극적입니다. 이어서 이른 봄에 수양버들잎 새순 돋아나면 연푸른 채찍이 되어 낭창거리듯 가슴 속을 휘저으며 달리는 농밀한 느낌은 한 잔의 차 속에 한 채의 솔산을 다 마신 듯 푸르게 차오르며 든든합니다.
모래사장이 아름다운 중리해수욕장에 갔습니다. 주변의 주민들은 얼마나 부지런한지 아직 식전인데 낫을 들고 울역을 나왔습니다. 방학한 여중생도 나와서 주변을 정리합니다. 잡풀을 베고 밤새 파도에 쓸려온 쓰레기를 모아 태우고 벤치 주면의 휴지를 줍습니다. 이곳의 파도소리는 먼 수평선에서 출발한 듯 씩씩한 말발굽소리, 사부조율의 해조음인데 주변 경관은 나뭇잎 태우는 연기 속에 로맨틱하기 그지없습니다. 나무모양의 인조목으로 된 식탁과 벤치들이 키 낮은 적송 수풀에 숨겨져 있어서 더없이 아늑하고 사랑스런 해변입니다.
밤새 잠 못자고 뒤척이든 눈이 도리어 말간 초록빛이 되었습니다. 담록의 들판과 청남빛 바다, 푸르스름한 안개로 물들어버린 망막에는 비취이는 사물이 모두 초록빛인 듯합니다. 보옥산 가는 길로 들어서면서 하얀 수포를 일으키는 절벽 아래 파도를 데리고 달렸습니다. 일순 두려움이 밀려오는 낙석주의 푯말을 지나자 망끝전망대라는 내밀은 섬의 끝이 나타납니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은 거칠 것 없는 오직 망망한 수평선... 엷은 청색의 허리띠를 두르고 좌정한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숨죽이고 바라봅니다.
멀리 옥매도, 미륵도, 상도, 가도, 모래섬, 멍섬, 닭섬, 소닭섬... 그리고 상,하추자도가 거느린 이름도 예쁜 섬, 섬들... 다무래이, 직구, 수령섬, 낙생이, 공여, 염섬, 미섬, 검등여, 추포도, 문여, 횡간도, 검은가리, 미역섬, 개인여, 시루여, 상섬, 덜섬, 구멍섬, 보존섬, 쇠머리, 쇠코, 모여, 수덕이, 푸랭이, 밖미역섬, 섬생이, 수영여, 아, 그리고 마지막은 절명이...
보옥산 아래는 다시없는 에머랄드빛 바다가 잠자고 있습니다. 만과 방파제에 다소곳이 갇혀서 고요한 보석같은 바다를 보며 차라리 한 마리 인어가 되고싶었습니다. 사람이기를 뿌리치고 오직 다리없어 걸을 수 없고, 목소리 없어 침묵할 수밖에 없는, 어느 날 새벽 드디어 이루지 못할 사랑의 종말을 한 줌 물거품으로 기화시키고마는 인어공주의 운명이기를 바랬습니다.
뾰죽산 돌밭 사이로 무리진 동백나무 숲은 짙푸른 새잎으로 아름답고 그 뿌리는 질기고도 당차게 땅에 흡착하고 있었습니다. 사정없이 휘몰아 부는 바람 속에 뽀죽산 아래 갯돌들은 끝없는 파도의 애무 속에 더 이상 닮아진 곳 없는 고운 살결로 무리지어 누운 관능적 자태들이었습니다.
...아직 미완.
'01.7.27 여름의 정상에서 푸른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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