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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행자의 독백

푸른샘100 나를 위해 한 장의 기차표를 산다 본문

깊고 푸른 샘

푸른샘100 나를 위해 한 장의 기차표를 산다

SHADHA 2004. 2. 14. 00:47


푸른샘님께서 남겨주신 100번째 글



나를 위해 한 장의 기차표를 산다.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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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한 장의 기차표를 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은 기차 여행입니다. 쾌적하고 편안한 기차를 타고 환하게 뚫린 들판을 달리는 동안은 오직 나만의 시간입니다. 나는 그 안에서 마음껏 추억을 되작이고 미래를 향한 부픈 계획으로 현실과 공상 사이를 오갑니다. 기차는 때로 긴 터널을 먹먹하게 지나기도 하고 가파른 샛길을 따라서 꾸불거리다가 암벽 아래 유리처럼 파란 색으로 빛나며 고요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강물을 만나기도 합니다. 아, 저 건너 산에는 구불구불한 나선형의 오솔길이 산 위를 향해 푸른 리본처럼 풀려있습니다.

나는 항상 혼자 떠나지만 이제 그대는 내 안의 온실에 그득한 햇살을 받고 방울방울 떨어지는 푸른 산소를 마셔서 싱싱하게 잘 자란 동행이 되어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우리의 태초에 나의 가슴 속엔 아기방을 꾸미듯 포근하고 넓은 구덩이가 파였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재우듯 조심스런 손길로 잔뿌리까지 쭈욱 편 그대가 심겨졌습니다. 곱게 채로 친 흙을 솔솔 뿌리고 가만가만 살살 다독여 주었지요. 그대는 자라서 가지 끝마디에서 넓게 퍼지는 독특한 광휘와 섬세하고 매혹적인 흔들림을 가진 백양나무 한 그루가 되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 그대로를 보여주는 거울같은 그대... 바로 차창에 어리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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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드디어 온 땅과 하늘을 장악했습니다. 폭염을 내리쏟다가 장난처럼 소나기 한줄기를 뿌려놓고, 다시 빠져드는 그 불안한 평화같은 나른함 속으로 촘촘한 촉수를 뻗댑니다.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구름으로 정복된 하늘에서는 묽은 여름비 냄새가 납니다. 비를 머금은 바람의 내음새인 것도 같습니다. 낮게 물드는 젖은 석양을 틈타서 화이트 와인 두 잔을 마셨습니다. 초록빛 논머리 위로 날아가는 백로의 하얀 날개도 사그러져가는 노을따라 보랏빛으로 물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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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들고 다니던 낡은 책을 펼치자 갈피에서 세피아빛 스냅 사진 한 장 떨어집니다. 꿈처럼 정지된 세상이 그 속에 아직 있습니다. 전자오락에 미쳐서 청춘을 버린 사촌과 실패한 사랑을 버리고 먼 타국으로 떠나버린 키 작은 이모, 그리고 아직도 미완의 내가 서있습니다. 두어 살 터울 밖에 나지 않는 청춘의 친족들이 어느날 모여서 놀았나 봅니다. 쓰게 웃음 짓자 배경에 흐르던 황룡강 강모래 한 웅큼이 설탕가루처럼 우수수 떨집니다.

도착한 숲의 밤공기는 소나무 향이 흠뻑 배어있어서 그저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한 가지 치료가 될 듯합니다. 나뭇가지 위에서 떨어질 듯 가까이 반짝거리는 무수한 별 때문에 풀 먹인 옷깃 속으로 찾아드는 서늘함이 마치 바람을 입은 듯 날개짓 하면 떠오를 듯 가볍습니다. 새 종이 봉지 속에 담긴 종이로 오린 인형처럼 삼림의 푸른 향기에 눅진하게 젖어봅니다. 보름을 향해 채워가는 달의 숨소리가 구름 사이로 거칠게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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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둔 그대는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곳에서도 아무 근심없는 명랑한 얼굴로 탁구공처럼 튀기는 왕복 진자 운동을 하곤 했습니다. 상상 속의 그대여, 날마다 증권회사 간부를 들볶는 재미로 산다고 속되게 웃어대더니, 오랫만에 전화를 하면 태엽 감긴 자동 인형처럼 발딱 일어나 서두르곤 했지요. 그러나 이 밤, 그대에게서 발광되는 별빛을 보아라. 정교하고 섬세한 손으로 짓는 네 유순한 손의 포즈, 그대는 때로 맨발로 들을 거니는 산처녀처럼 살았었다... 참으로 그대의 삶은 불가사의합니다.

낯선 방 침실에 누워 커튼이 바닷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나른한 행복입니다. 그 안에 숨은 가벼운 香草 냄새가 아련합니다. 바다쪽에서 불어오는 미풍 속에 짭쪼름한  여름 냄새를 맡았습니다. 뽀송거리는 하얀 시트 위로 때로는 특이한 양념처럼 때로는 투명한 쏘쓰처럼 덧칠해지는 그대 향취를 그리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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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도시의 삶도 대체로 잔잔하고 평온하였습니다. 가끔은 분노하고 충돌하여 낙심하고 후회하는 삶이었지만 이 여름 들어서는 閒遊한 오후 시간이 필요로 하는 운동신경의 흥분을 위해 에르고메타의 페달을 수없이 돌리고 돌렸습니다. 정신의 연필심을 수 백 자루 깎아내듯이 땀을 비오듯 쏟고나서야 맑아지는 뇌열 사이로 가로등이 하나씩 점등됩니다. 그제서야 또렷해지는 어머니, 돌아갈 집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직도 살아 숨쉬는 나의 밭, 내 하얀 맨발이 심기워진 정결한 밭입니다. 항상 영혼의 간구와 육신의 수호, 그 안에 끝없는 생의 에너지와 신념, 혹은 용기, 그 모두를 공급하는 젖줄인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어머니가 水原인 사람에겐 아직 밭은 불필요합니다. 경험 많고 능력있는 늙은 어머니는 행복을 찾을 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 쉼없이 발산하니까요.

세상 만물은 떠돌며 읽히는 책이며 그림이며 드디어는 돌아갈 아득한 뜨거움이었습니다.



'01.8.14

홀로 떠난 여행을 더듬으며 푸른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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